1910년 8월 3일 일본이 조선을 합방한다는 합방령(合邦令)이 군청을 거쳐 마을로 하달되자 매천 황현은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자기는 관리가 아니기 때문에 죽을 의리는 없지만 나라가 망했는데 500년 사직에 한 사람의 사대부도 죽지 않아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죽을 때 절명시 4수를 남겼다.
난리 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그동안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되었구나.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치는도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자리 옮겨지더니,
구중궁궐 침침해 해만 길구나.
이제부터는 조칙(詔勅)이 다시 없을테니,
옥같이 아름다웠던 조서(詔書)에 천가닥 눈물이 흐르는구나.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낯을 찡그린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했구나.
가을 등잔불 밑에 책 덮고 수천년 역사를 회고해 보니,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일찍이 나라위해 한 일 조금도 없는 내가,
다만 살신성인(殺身成仁)할 뿐이니 이것을 충(忠)이라 할 수 있는가?
겨우 송나라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다.
송나라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부끄럽도다.
망국 직후 지식인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보지 못하고 죽는 자괴감을 읊은 것이다. 매천은 1862년(철종 13)에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나 1888년(고종 25)에 생원시에 장원했으나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구례 만수동(萬壽洞)에 은거했다. 성품이 강직해 불의를 참지 못했다 한다. 이러한 성품은 조상 중에 중시조인 황희(黃喜)의 청백리 정신, 임진·병자란 때 외적과 싸운 황진(黃進)·황위(黃暐)의 애국정신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더구나 동생 황원(黃瑗)도 1944년 2월 27일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역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형제가 사대부의 사기(士氣)를 살리기 위해 자결한 것이다. 국가에서는 많은 사대부를 양성했으나 나라가 망하는데도 항거하는 사람이 적었다. 이런 때에 국록도 먹지 않은 황현 형제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항거했다는 것은 지식인의 귀감이 될 만하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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