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17) 식민지 조선의 인공낙원, 백화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17) 식민지 조선의 인공낙원, 백화점

입력
2010.05.24 13:35
0 0

■ 경성 5대 백화점, 조선인들 일상에 식민지 자본주의를 깊게 심다

한 나라를 정복하려면 총칼의 힘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정복한 나라를 계속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력만으로는 어렵다. 그래서 식민지 지배는 언제나 물리력뿐 아니라 정신적 측면에서 공작을 병행해왔다. 일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 식민사관을 퍼뜨리고 소위 '문화통치'로 민족 분열을 부추겼으며, 자본주의적 경제제도를 이식해 근대성을 과시했다.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백화점이 한반도에 생겨난 것은 식민 통치가 본격화한 1920년대 중반. 번쩍이는 쇼윈도와 그 안의 진기한 상품, 신식 판매제도 등을 갖춘 백화점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충격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백화점은 조선의 중소상인을 위협하는 한편, 대중의 일상에 깊게 파고들었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로 1가에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점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러나 쇼핑백을 든 사람은 열에 한 명이 안 됐다. 예나 지금이나 백화점은 꼭 물건을 사기 위한 곳이라기보다 입장료가 없는 쾌적하고 세련된 복합문화공간에 가깝다. 80년 전에도 이곳은 수많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 문인, 예술가, 룸펜 등에게 사교와 담화를 위한 장소였다.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명품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구관은 일제시대 최고의 매출을 자랑하던 미쓰코시(三越)백화점이었다. 2005년 본래 외관을 그대로 살려 재개관했다. 일제강점기 이 건물에 있던 중앙계단 일부가 경기 용인시 남사면의 '한국상업사박물관'에 남아 있다.

일찍이 서양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1905년 백화점이 첫 문을 열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대량소비를 유도할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 자본주의가 한창이던 1920년대, 경성에 진출해 있던 히라타(平田ㆍ현 중구 충무로 1가 대연각빌딩) 상점이 1926년 백화점으로 전환하면서 백화점 시대가 열렸다. 혼마치(本町ㆍ일본인 거리로 현재 명동 일대)에 터를 잡은 조지야(丁子屋ㆍ현 소공동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와 미쓰코시, 미나카이(三中井ㆍ옛 원호청) 등 일본 백화점과, 유일하게 조선인이 운영하는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을 합쳐 경성의 5대 백화점이라고 불렀다.

백화점은 으리으리한 외관부터 조선인을 압도했다. 황홀한 쇼윈도와 엘리베이터 등 신식시설을 갖춘 백화점은 수학여행이나 상경객의 필수 관람 코스가 되어 연일 붐볐다. 박태원의 소설 '여인성장'은 "마침 구경을 온 듯 싶은 시골 사람이 두 명 저편 철책 압헤 가 서서 입을 따버리고 연해 눈을 두리번거리며 시가를 나려다보고 잇섯다"라고 당시 미쓰코시백화점의 옥상정원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인은 고급음식점, 미술관 등을 갖춘 백화점을 즐기는 일 자체를 새로운 문물의 혜택으로 느꼈다.

물건을 파는 방식도 혁신적이었다. 정찰제와 할인 대매출, 무료 배달, 자유로운 반품, 광고, 상품권 발행 등은 옛 상점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었다. 귀금속, 가구, 양복 등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취급 품목을 보고 당시 한 신문은 "사서 들고 나아오는 것은 안 사도 조흘 것 같은 것"이라며 "전당을 잡고 무엇을 팔아서 물건을 사지 말고… 백화점에 밋치지 말라는 말슴"이라고 세태를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백화점의 인기는 시들 줄 몰랐다. 1933년 2월 미쓰코시와 화신, 조지아 세 백화점의 하루 고객 합계는 34만명으로, 당시 서울 인구 30만명보다 많다.

일본 경제학자 하야시 히로시게(林廣茂) 는 저서 (2007)에서 "조선 사회의 일본 '적응화'와 조선인의 일본인 '적응화'가 강하게 진행되었고, 그 노하우가 해방 이후의 한국에 이어졌다"면서 "특히 1935~40년에는 백화점이 융성할 정도로 조선인의 구매력이 높아졌다"고 호혜적 관점에서 조선의 백화점을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백화점에서 소비할 수 있는 계층은 극히 일부였고, 이는 대중에게 새로운 계급의 탄생을 의미했다. 가령 백화점 인근 혹은 내부 카페의 커피 한 잔은 10~15전으로, 조선인 남자 노동자의 일당 60~80전으로 드나들기란 쉽지 않았다.

일본은 자국에서 중소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하던 '백화점법'을 조선에서는 일절 펼치지 않았다. 조선을 침탈의 대상으로 여긴 방증이다. 1935년 1개 백화점의 평균매출액(243만원)이 개인상점의 184배에 이르는 등 중소상인의 어려움은 날로 더해갔다. 같은 해 5개 백화점의 매출액은 서울시내 약 7,800여 개의 상점 매출액의 5.6%(2억 1,300여 만원 중 1,200만원)를 점했다. 백화점 내 갤러리는 제국의 시각을 반영하고 홍보하는 공간으로 쓰이기도 했다. 친일 화가 김은호가 1937년 중일전쟁 때 친일여성단체 애국금차회가 금을 헌납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을 이틀간 전시한 것이 그 예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도 백화점 열풍은 대단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백화점은 향유 계층이 극소수로 한정돼 있었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식민지 자본주의를 오롯이 드러내는 아픈 공간이었다.

해방된 지 65년, 오늘도 백화점은 손님들로 붐빈다. 소비할 것을 찾아 화려한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21세기의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을 보며, 1930년대 경성 풍경을 떠올려 본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 애국심을 자극해 번영 꾀해

"개관 첫날 이른 아침부터 귀부인, 유한마담에서부터 룸펜에 이르기까지 장안 사람들은 물밀듯이 화신 문전에로 몰려들어 온다."(대중잡지 '삼천리' 1935년 9월호)

지금의 서울 종로2가 종로타워 자리에 있었던 화신백화점은 일제강점기 경성의 5대 백화점 중 유일하게 조선인이 경영했다. 화재로 본래 건물이 전소하면서 1937년 신축한 지하 1층 지상 6층의 건물은 당시 경성의 어느 백화점보다 규모가 컸다. 1935년에는 전국에 350개나 되는 점포망을 갖췄고 방문객 수도 미쓰코시백화점과 선두를 다퉜다.

화신백화점은 1890년대 귀금속 전문상인 화신상회로 출발, 1931년 양지(洋紙) 도매상이던 박흥식(1903~1994)이 인수하면서 근대식 백화점으로 태어났다. 백화점 경영 경험이 없었던 그는 일본인을 임원으로 고용하는 등 일본 기업과 일본인의 힘을 빌려 경영했다.

그는 친일파였다. 매국노가 들끓던 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등을 지냈고, 군수업체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사장을 맡아 일제에 군용 비행기를 헌납했다. 해방 후 친일파 단죄에 나선 반민특위는 1949년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저 그를 잡아들였다.

그러나 뻔뻔하게도 그는 일본 자본의 대형 백화점에 맞서 '민족'이란 이름을 자주 팔았다. '삼천리' 1934년 8월호에 '화신의 성패는 민족적 명예 소관'이라는 글을 싣고, 화신백화점을 일제 침략으로부터 조선의 상업경제를 막아줄 수호자라고 주장했다. 신문 광고에서도 틈만 나면 동포애를 자극해 번영을 꾀했다.

박흥식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에도 올라가 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일본 연구의 영향을 받아 박흥식이 일본을 이용해서 조선인 상권을 지키려 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그의 친일 행각은 명백해 학계에서 이견이 없으며 후손의 반발도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 "백화점은 여성의 공간… 근대적 소비의 주체로 변화시켜"

오늘날 각종 미디어를 뒤덮고 있는 광고의 대다수는 여성을 주로 겨냥하고 있다. 상품의 구매 여부를 결정하는 사람이 대부분 여성, 특히 주부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여성이 소비의 주체로, 그것도 가정경제를 대표하는 소비자로 등장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대도시에 등장한 백화점은 그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든 여성의 공간이었다.

백화점은 남성보다는 여성을 위한 장소였다. 백화점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과는 구분되는 공적 영역을 여성에게 제공했다. 이곳에서는 남녀의 성별 분리가 상품에 따른 공간의 구분으로 전환되었다. 여성은 백화점에서 가부장적 차별을 벗어나 근대적 (소비)대중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여성은 상품 구매뿐 아니라 대중적 취미생활과 사교의 공간을 얻게 되었고, 판매원으로 취업할 기회 또한 가졌다. 고객과 마찬가지로 점원 역시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여성 점원들의 존재 자체가 백화점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백화점의 출현은 여성 해방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질 만했다.

"아주머니들 좀 무당 판수에 미치듯이 백화점에 미치지 말라"는 1930년대의 신문 기사는 백화점의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당시 사회(남성)가 가졌던 부정적 시선을 온전히 담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을 백화점으로 '출근'하게 만든 것은 단순히 승강기의 매력이나 백화점 꼭대기의 천국 같은 식당만은 아니었다.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행문은 하나같이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기나긴 흥정을 한국 상업의 특징으로 언급하고 있다. 온종일 밀고 당기는 이 과정을 외국인들은 비합리적인 시간 낭비로 인식하기 일쑤였지만, 넉넉한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었던 전통사회의 한국인들에게는 놀이의 일종이라고 할 정도로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상거래 관행은 자본주의적 도시 상업의 발달과 함께 서서히 변해갔다.

정찰제를 채용한 백화점은 입씨름과 흥정을 없앴다. 진열된 물건을 구경하더라도 구매 의무는 없었다. 백화점의 거래 방식은 상인이 보여주는 상품 범위 안에서 상인이 제시하는 가격을 놓고 길고도 험난한 흥정을 거쳐야 하는 전통적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상품을 사지 않더라도 백화점을 즐길 수 있었고, 누구든 돈만 있으면 동등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비록 민족과 계급, 계층과 성별을 가르는 차별이 엄연했음에도, 백화점은 순식간에 근대적 소비문화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훌륭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만 자기 코가 높아지는 듯한 선입견을 가진 것이 신식여자인가 보아요. 그렇다면 배우는 것이 도리어 우환"이라는 비난도 백화점으로 향하는 발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