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벽은 높았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23일 오후(이하 현지시간) 막을 내린 제63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했다. 현지 언론 등으로부터 대상인 황금종려상의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된 점을 감안하면 다소 실망스러운 성과다.
그러나 '시'의 칸 영화제 수상은 한국영화의 저력을 다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진출한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가 이 부문 최고상인 '주목할만한 시선 상'을 받은 점도 한국영화계에 고무적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한국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두 개 이상의 상을 거머쥐기는 처음이다.
2%가 모자랐던 '시'
지난 19일 기자 시사회와 공식 상영회를 거치며 '시'는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영국의 영화 주간지 스크린 인터내셔널이 "인내력을 가진 관객이라면 극 속에 감춰진 깊이를 보게 될 것"이라고 극찬하는 등 호평이 이어졌다.
지난해에 비해 범작과 신진 감독들이 경쟁부문에 대거 진출한 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황금종려상 경쟁이 조금은 버거워도 주연 윤정희의 최우수여자배우상 수상은 가시권이라는 관측도 강했다.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 최근호는 "윤정희와 줄리엣 비노쉬 등 3명의 경쟁으로 압축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의 황금종려상 수상 실패 요인으로는 심사위원단과의 '궁합'이 우선 꼽힌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기이한 판타지 영화를 주로 연출해온 미국의 팀 버튼 감독이 심사위원장이었던 점이 악재로 작용한 듯하다. 인상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묘사대신 담담한 화법을 택한 점도 심사위원단의 마음에 어필하지 못한 것으로 분석된다.
충무로 잠재력 재확인
영화인들의 기대에 못 미친 결과지만 '시'의 수상으로 충무로의 잠재력은 재확인됐다. 2002년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감독상을 받은 뒤 경쟁부문에서 꾸준히 상을 받고 있는 점도 긍정적이다. '시'와 '하녀'가 아시아 국가에선 유일하게 경쟁부문에 동반 진출한 점도 이번 영화제의 성과로 꼽힌다.
'시'의 수상을 한국영화 예술성 회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흥행이라는 양적인 면에만 관심을 쏟지 말고 영화의 문화적 동력 확보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씨는 "'시'와 같은 영화에 대한 정책적 배려와 관객들의 응원 등이 절실하다는 것을 다시 보여준 수상"이라고 평가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며 "한국영화계에 순기능을 가져다 주기 바란다"고 희망했다.
태국 영화가 황금종려상 안아
올해 칸 영화제는 정치색 짙은 영화들이 스크린을 장식한 가운데 태국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의 '전생을 기억해낼 수 있는 분미 삼촌'이 대상인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았다. 태국영화 사상 최초이며 아시아 영화로는 1997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이란 영화 '체리향기'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일본 영화 '우나기'의 공동 수상 이후 13년만의 수상이다.
2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은 프랑스 영화 '신과 인간의'가 차지했으며 프랑스 영화배우 겸 감독 마티유 아말릭의 '여행에 관하여'가 감독상을 받았다. 스페인ㆍ멕시코 합작영화 '비우티풀'의 하비에르 바르뎀과, 이탈리아 영화 '우리 인생'의 엘리오 제르마노가 최우수남자배우상을 공동 수상했다. 줄리엣 비노쉬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서티파이트 카피'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가져갔다.
차드 영화 최초로 경쟁부문에 진출한 마하마트 살레 하룬 감독의 '비명 지르는 남자'는 심사위원상을 차지했다. 신인 감독에게 주어지는 황금카메라상은 멕시코 감독 미카엘 로에의 '윤년'에게 돌아갔다.
칸=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