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크스(jinx)다. 본래 고대 그리스에서 마술에 이용하던 딱따구리의 일종인 '개미잡이'라는 새 이름에서 유래한 말로서 불길한 징후를 뜻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선악을 불문하고 불길한 대상이 되는 사물 또는 현상이나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일 등을 지칭하는 말로 통용된다. 이명박 정부와 늦봄이 줄곧 얽히는 관계를 보면 이 용어가 참으로 유용하다.
어설픈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과 안이한 사후대처가 촉발한 전국적 촛불시위가 정점에 이르러 정부 출범 첫 해부터 정권의 성격과 한계를 드러낸 때는 2008년 5월 하순이었다. 지난 해 이맘때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이 낳은 '서거정국'의 책임론으로 정부는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살벌한 말을 주고받으며 정부는 반대세력과 또 한 차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북풍-노풍 맞붙은 3년째 징크스
그리고 지난 20일 민군 합동조사단의 천안함 침몰사태 조사결과 발표에 이어 어제 북한의 군사도발을 비난하고 자위권 발동을 포함한 단호한 대응의지를 국내외에 천명하는 이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있었다. 천안함 사태가 발발한 것은 2개월 전이지만 전쟁기념관에서 국가원수이자 국군통수권자로서 완결된 입장을 밝힌 시점은 운명적이라고 할 만큼 맥락이 묘하다. 하루 전 서울시청 광장과 김해 봉하마을에서 거행된 '노 대통령 서거 1주년 추도식' 장면과 극적으로 대비되고 또 겹쳐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대비는 지방선거의 구도로 얘기되는 '북풍'과 '노풍'의 대립이고, 겹침은 분단체제의 질곡과 민주화 이후의 과제다. 문제는 양쪽에서 균형있게 불어 나라를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할 바람이 한 쪽으로만 불어대 사회의 긴장과 갈등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제 대통령 담화가 주문한 '국가안보 앞에 하나 되는 우리'는 그제 노무현 추도식에 참여한 '사람사는 세상으로 걸어가는 우리'와 너무 다르다.
이런 대립 앞에서는 내 생각과 다른 '사실'은 존재할 수 없고, 합리적 의심은 유언비어 단속대상으로 매도된다. 객관과 합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공론장은 불신과 욕설로 도배질되는 난장판이다. 오늘 객관을 주장하는 세력은 어제 주관을 앞세웠던 세력이고, 어제 합리를 강조했던 세력은 오늘 돌연 비합리에 기대는 세력이 됐기 때문이다. 어제 하루만 해도 북한의 무력도발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는 그 옆에서 민군 합조단 발표의 신뢰성을 따지는 토론회가 열리고, 여야의 상반된 주장이 춤을 추는 가운데 4대 종단은 종교인의 입장을 내놨다.
한때 세종시 문제를 놓고 이 대통령과 박근혜 씨가 벌였던 '강도론'언쟁도 재연된다. 야밤에 무도한 강도집단이 침입해 흙발로 온 집안을 휘젓고 인명까지 살상했으면 먼저 발자국의 장본인을 찾아 따끔하게 책임을 물어야지, 가장에게 왜 강도를 막지 못했느냐고 열 올리는 집단의 정체는 뭐냐는 것이다.
어쨌든 이명박 정부가 3년째 늦봄만 되면 거센 반대세력과 어김없이 만나는 상황은 분명 반갑지 않은 징크스다. 그것은 반대세력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런 징크스가 뿜는 적대의 독설은 올해 안보변수를 만나 증폭되고 있다. 보수적 가치인 성장과 경쟁, 진보적 지향인 균형과 동행이 만날 길은 한층 아득해졌다. 더구나 투표소에서 8번이나 기표해야 하는 전국적 선거게임이 눈앞에 있다. 정치적 손익계산서로는 갈등과 편가름을 날카롭게 끌어갈수록 이익이 더 나는 상황이다.
보수-진보의 이항대립 사고 깨야
그래도 답은 있다. 늦봄만 되면 반복되는 정치사회적 징크스의 본질을 우리가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집권세력부터 이항대립적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양날개로 하지않으면 결코 선진국에 진입할 수 없다는 인식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 정부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수 없다는 세력도 이런 유연성을 갖지 않으면 함께할 정부는 결코 오지 않는다. 낡은 동화 같은 얘기를 길게 한 것은 대립하는 가치에 분단의 멍에까지 더해진 이 어지러운 늦봄을 건강하게 살아내기 위해서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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