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眞空)이라는 말은 텅 빈 공간, 우주 그리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는 깨끗한 환경을 연상시킨다. 진공을 뜻하는 영어단어 vacuum은 '비어 있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부터 유래했는데, 진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데모크리토스와 이를 부정하고 자연은 어떤 물질로든 충만해 있다고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2400년 전 주장이 전해지고 있을 만큼 아주 오래 전에 제시된 개념이다. 철학적으로는 완전하게 빈 절대 진공 상태를 말하지만, 과학 기술적으로는 대기압보다 낮은 압력 상태를 진공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생활하는 대기압(약 1기압) 상태에서는 1 cm3 당 1조의 2,500 만 배인 약 2,500경개의 기체 분자들이 빠른 속도로 돌아다니고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체 분자들이 주위를 돌아다니다 보니, 손톱 만한 1 cm2 정도 표면에 기체가 충돌하는 횟수가 1초 당 1조의 2,000억배나 된다. 진공기술은 인위적으로 일정 공간을 배기하거나 기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해서 압력을 낮춘 뒤 이 상태에서 원하는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술이다.
진공 상태에서는 대기압 환경에서는 얻지 못하는 여러 가지 유용한 특성이 나타난다. 진공상태가 되면 생화학 작용은 억제되고 증발과 승화작용은 촉진되므로, 식품 보관, 의약품 제조, 카피나 라면 수프 등 건조 식품 생산에 사용된다. 단열과 차음이 되므로 보온병 단열재 차음재 제작에 사용된다. 전구 필라멘트처럼 고온에서 사용하는 재료가 산화되는 것을 막아 주며, 질 좋은 박막을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어 안경과 카메라 등 광학 렌즈나 기능성 금속 코팅에도 사용된다.
진공에서는 전자를 기체 분자와 충돌 없이 원하는 곳으로 정확하게 보낼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텔레비전이 발명되었다. 지금 사용되는 평판 텔레비전이나 모니터 역시 진공 상태에서 진공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진 제품이다. 표면에 충돌하거나 달라붙는 기체 분자수를 줄여 표면 관측이나 분석, 첨단 과학 연구가 가능해지고, 고순도 소재 개발이나 신소재 개발도 가능하다. 여기에 청정 환경과 정밀한 박막 증착(蒸着) 및 식각(蝕刻) 기능이 더해져 고집적 반도체가 생산된다.
핵융합 장치와 입자 가속기는 그 자체가 거대 진공장치이다. 나로호로 올라 갈 과학위성이 운영되는 300-1,500 km 고도는 약 10억분의 1기압, 올해 발사가 예정되어 있는 정지궤도 위성 고도인 3만6,000 km에서는 약 1,000조 분의 1기압 정도의 진공상태이므로 우주 과학 기술 개발을 위해서도 진공 기술이 필수적이다.
진공 상태를 만든 용기에서 기체 분자가 튀어 나오거나 다른 곳에 있던 기체 분자가 옮겨오는 것 때문에 인공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진공도에는 제한이 있다. 현재 만들어 낼 수 있는 진공도는 정지궤도가 떠 있을 우주의 진공도보다도 수십 배 낮은 정도이나, 아직 정확한 측정 방법이 없어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지금도 과학자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진공의 한계에 도전하며 절대 진공 상태를 추구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소립자 생성 소멸, 우주 진화 등 기초 과학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얻어진 지식들이 앞에서 거론했던 많은 산업 분야에서 원천기술로 사용되고 큰 파급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시 도전이 필요한 분야이다.
비우면 비울수록 많이 보이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며, 얻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다. 이런 면에서 진공 기술은 우리 마음을 닮은 것 같다.
신용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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