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쿰빗은 태국에서 가장 번화한 성매매 지역입니다. 온갖 계급과 인종, 직업이 공존하고, 구성원 개개인도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듯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합니다. 비열한 협잡과 진실한 이타심이 아무렇지 않게 함께하고요. 이토록 이질적인 존재들이 모여 살지만 신기하게도 '폭발'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를 질문하며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가 박형서(38)씨가 등단 10년 만에 첫 장편 (문학과지성사 발행)를 펴냈다. 두 번째 단편집 (2006) 출간 이후 4년 만이다. 원고지 1,750매 분량으로, 요즘 웬만한 장편소설의 두 배에 달하는 이번 소설은 태국 방콕의 최대 사창가인 수쿰빗, 그 안에서도 가장 번화가인 나나 역과 성매매 여성들의 집단 거주지인 소이식스틴('16번 골목'이라는 뜻)을 주무대로 하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만 해도 10명을 넘는 이 몸집 큰 소설에서 중심축이 되는 내용은 한국인 레오와 소이식스틴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고급 매춘부 플로이의 연애담, 정확히 말하면 플로이에 대한 레오의 줄기찬 짝사랑이다. 아프리카 여행의 경유지로 태국에 들렀다가 플로이에게 반해 그녀의 방에 눌러앉은 레오는 도도한 그녀와 염치없는 그녀의 동료 매춘부들에게 바보처럼 이용만 당한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연애소설인 것은 아니다. 한 여자에 대한 가망없는 순정으로 소이식스틴을 떠나지 못하는 이방인 레오의 눈에 비친 이곳 인간 군상의 수다한 사연이 바로 이 소설의 본령이다. 이국의 낯선 지역, 그것도 독특하고 은밀한 질서로 돌아가는 사창가를 작품의 생생한 무대로 삼고자 박씨는 2년 여에 걸친 현지 취재를 진행했다. "2007년부터 태국에서 가까운 중국 광둥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며 방콕을 자주 찾았다. 이듬해엔 아예 태국에 방을 얻어 7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초고를 썼다."
덕분에 소이식스틴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로도 별 부족함이 없게 된 이 소설에 작가 박씨는 그간의 단편소설들에서 보여준 특유의 환상성을 가미했다. 소이식스틴을 호령하던 전설적 매춘부 지아가 자신의 권위를 플로이에게 물려줬다는 신화적 설정이나, 거리의 무법자 행세를 했던 경찰관 아잇의 최후를 초자연적 재앙에 빗대 표현한 장면 등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비정한 거리에서 제가끔의 상처를 껴안고 혼신을 다해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성격 묘사다. 어릴 적 오빠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구걸을 하느니 매춘을 하겠다"는 자존심으로 꿋꿋이 살아온 플로이, 관제사였던 자신의 실수로 항공기 탑승객 전원이 몰살당했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아파트 방에 틀어박혀 끝없이 비대해져 가는 우웨, 무능한 남편 대신 마약을 팔며 억척스레 살다가 출산 중 죽은 뒤 유령이 돼서 가족을 돌보는 솜 등등.
독자를 매혹하고 때론 눈물겹게 하는 이들의 삶은 작가 박씨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일 테다. "굳이 슬퍼할 이유는 없다. 우리 각각이 생명이듯, 이 더럽고 끈적끈적한 거리 역시 생명이다. 어느 바보가 거기에 대고 불평한단 말인가?"(402쪽)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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