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 잊혀졌던 추억 속의 단어가 이 정부 들어 되살아났다. 유언비어(流言蜚語). 2008년 촛불집회 때 '광우병 괴담'과 함께 부활한 이 말이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정부는 20일 천안함 사건 민군합동조사결과가 발표된 뒤 침몰 원인 등을 둘러싼 유언비어에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천명했다. 검찰은 이미 지난달 28일 천안함과 관련한 근거 없는 유언비어 유포행위를 엄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70~80년대 '막걸리 보안법' 시절에나 어울릴 듯한 이 복고풍 단어가 정보 민주화가 꽃을 피우고 있는 21세기에 다시 등장한 것은 아이러니다. 그 말 뒤에 따라붙는 '단호 대처''엄정 처리' 등의 꼬리말도 귀에 익은 가락이다.
이 정부 들어 국가기관과 고위공직자가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형사 고소하는 일도 익숙한 풍경이 됐다.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보도한 MBC PD수첩 제작진이 재판에 회부된 이후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가 기소됐고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국가정보원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됐다. 최근에는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김태영 국방부장관이 박선원 전 청와대 비서관을 명예훼손 혐의로, 해군은 민군합동조사단에 민간위원으로 참여한 신상철씨를 허위사실 유포(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이 가운데 미네르바와 PD수첩 제작진은 이미 1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돼 검찰이 무리한 기소를 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김 장관과 해군의 고소에 대해서도 논란이 적지 않다. 원칙적으로, 국가나 고위공직자가 정책이나 직무와 관련해 명예훼손 고소나 소송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법률가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때문에 정부의 무리한 고소 남발이 비판세력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엄포성 조치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든다.
유언비어가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든 데에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 광우병 파동과 천안함 사건에서 보았듯이 정부의 잇단 실책과 소통 부재가 불신을 키워 잘못된 정보를 믿게 만든다. 이런 이치를 도외시한 채 유언비어 유포를 엄단하겠다며 함부로 칼을 휘두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정보가 막힘 없이 소통되는 디지털 시대에 잘못된 정보는 공론장에서 자연스럽게 걸러지도록 하면 된다. 그런 여건은 이미 충분히 성숙해 있다.
최근 방한한 프랭크 라 뤼 유엔 의사ㆍ표현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은 "지난 2년 동안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크게 위축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방한 기간 중 이명박 대통령과 총리, 관계부처 장관, 검찰총장과 국가정보원장 등 책임 있는 당국자들과의 면담이 하나도 성사되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감을 나타냈다.
기껏 만난 국가인권위원장은 라 뤼 보고관의 지적에는 귀를 닫고 엉뚱한 북한인권 얘기만 하는 바람에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됐다고 한다. 인권위원 합동 면담 요청도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은 라 뤼 보고관을 미행 사찰한 사실이 본보의 취재로 확인됐는데도 이렇다 할 해명조차 없다. 짐짓 무시하는 듯한 태도다. 혹시 유엔 보고관이 국내 문제에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라면 정말 심각한 문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핵심이고, 인권은 주권에 우선하는 인류보편의 가치이다. 이런 생각은 이제 상식이다.
"고위 관료를 만나는 것은 한국 정부의 인권 의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중요하다. 면담이 성사되지 않은 것은 인권 의지가 그만큼 약하다는 반증 아닌가." 라 뤼 보고관의 지적을 정부 당국자들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김상철 사회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