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그대와 함께 차 한잔'의 김수미입니다. 따스한 오월의 햇살이 비추고 사랑이 싹트는 금요일 오후네요."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1급 김수미(39)씨가 마음 속에 담아온 대본을 차근차근 말로 옮겼다. 매끄럽게 대본을 읊어가자 동료들이 "와~"하고 감탄했다. 부끄러워하던 김씨가 한술 더 떴다. "지금까지 제작에 김태균, 진행에 김수미였습니다." 동료 이름까지 곁들인 애드립에 좌중은 폭소와 박수를 쏟아냈다.
13일 오전 경기 성남시 중원청소년수련관 방송실. 장애인 전문방송인 양성을 위한 아카데미 지니스쿨(Genie School)의 수업이 한창이었다. 지니스쿨은 한소울장애자립생활센터(경기 광주시)가 기획한 프로그램. 명칭은 애니메이션 '알라딘'의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 이름에서 따왔다. 제 몸 가누기도 힘든 장애인들의 방송 도전과정은 실수의 연속이었지만 기쁨이 넘쳤다.
라디오는 내 친구
자신이 직접 기획한 라디오 프로그램 대본 숙제를 검사 받고 녹음에 돌입하는 날, 6년 전 시력을 완전히 잃은 김수미씨는 유일하게 대본을 종이에 적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유창하게 숙제를 읊어갔다.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던 2004년까지 3년간 극동방송 성우로 일했던 실력이 녹슬지 않은 덕이다. 강사인 안병천 관악FM 미디어총괄본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그러나 이내 쓴 소리가 이어졌다. "매끄러운 진행과 선곡도 중요하지만 시그널 음악은 가요보다는 연주곡, 가사가 귀에 덜 담기는 외국곡이 좋아요. 대사 사이에 음악을 넣고 싶으면 리듬을 고려해야 해요. 자칫 (청취자가) 피곤해질 수 있거든요." 김씨를 비롯한 수강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씨는 20세가 되던 1991년 만성신부전증으로 쓰러져 사흘간 사경을 헤맸다. 이후 7년간 복막투석, 신장이식수술 등을 하느라 병상에 누워지냈다. 설상가상 망막색소변성증(망막에 색소가 껴 결국 실명하는 유전병)이 진행돼 시야도 흐릿해졌다.
와병(臥病) 중에 유일한 벗은 라디오였다. "옴짝달싹 못하던 삶의 낭떠러지 앞에서 죽음만 생각했어요. 그때 라디오에서 들려온 수많은 사연들이 제게 속삭였어요.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24시간 라디오는 외로운 그에게 삶과 세상, 각종 정보를 들려주는 친구였고, 불면의 밤엔 감미로운 자장가였다.
2002년 라디오 성우 모집 공고를 들었다. 문득 잊고 있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꿈이 떠올랐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앳되고 맑은 목소리 덕에 성우가 되고 싶었던 것. 당시만 해도 뿌옇게나마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시각장애3급이라 당당히 도전해 합격했다. 동료들도 그를 따뜻하게 대했다. 그러나 2004년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면서 홀로 외출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어렵사리 이룬 꿈을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다시 기회가 왔다. 김씨는 지난달부터 지니스쿨에 다니면서 1인 혹은 2인 제작시스템으로 인터넷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 꿈에 부풀어 있다. "보이지 않아도, 라디오만 틀어 놓으면 사회 경제 소식을 모두 들을 수 있고 음악도 들을 수 있잖아요.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중도에 장애를 입은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방송을 만들고 싶어요." 그는 현재 장애인 동료상담사자격증과 웃음치료사자격증에도 도전 중이다.
이양옥(31)씨도 비슷한 꿈을 꾸고 있다. 그는 11년 전 출근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사고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고, 뇌병변장애1급 판정을 받았다. 10년 가까운 병원생활에 할 수 있는 일은 점차 줄어갔다. 하지만 최근 남자친구의 제안으로 라디오 제작자가 되기 위해 지니스쿨에 등록했다.
장애인의,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에 의한 라디오
장애인에게 방송이라는 색다른 꿈을 품게 한 이도 장애인이다. 한소울장애자립생활센터의 한동식 소장은 소아마비로 어릴 때부터 휠체어에 의지해 산다. 2005년 잠시 인터넷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 "의외로 많은 장애인이 방송을 통해 끼를 발휘하고 싶어하더군요. 장애인 스스로가 목소리를 담아 방송을 만든다면 일자리도 창출되고 더 많은 장애인 동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죠."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계획은 5년 뒤 현실이 됐다. 한 소장은 2007년 센터를 만든 뒤 방송실을 물색하는 등 오랫동안 준비한 끝에 4월 지니스쿨을 열었다. 8개월간 라디오 편성, 기계작동법, 선곡, 발성 등을 배우는 과정이다. 장애인 입장에선 매주 두 차례 빠짐없이 수업에 나와야 하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20여명의 신청자가 몰렸다. 비용은 경기도가 지원하고, 지역라디오채널인 관악FM은 수강생들의 프로그램이 완성되면 방송을 내보겠다고 약속했다.
1기 수강생 15명의 1차 목표는 라디오스타가 되는 것. 수강생 중 김태균 광명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지역라디오 방송국 개국이란 더 큰 목표를 갖고 있다. 88년 사고로 휠체어에 앉게 된 김 소장은 "장애인들의 인권과 욕구에 대한 목소리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장애인이 스스로 만든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매체를 구축하는 게 최종 목표"라고 했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라디오 방송은 있어도, 장애인 스스로의 힘으로 만드는 방송은 없다는 게 이들의 도전의지를 키운다. "갈 길이 멀지만 이제 첫 단추를 뀄다고 생각하면 되요." 예비 라디오스타들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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