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의 마술. 분명 어폐 있다. 그러나 지난 2004년 한국 연극 팬들은 러시아 연출가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51)가 연출한 체호프의 '갈매기'를 통해 사실주의의 환상에 도취했다. 너무나 잘 알려진 고전적 주인공들이 무대 마술을 거쳐, 희망에 들뜨고 절망에 고통받는 이웃들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예술의전당이 2004년의 영광에 다시 도전한다. 그 해 '다시 보고 싶은 무대 1위'로 꼽히고 국내 몇몇 연극상까지 휩쓸었던 지차트콥스키가 또 한번 한국의 무대를 달군다. 그가 지난 1월 내한해 뽑은 한국 배우들과 함께 만드는 '벚꽃동산'은 정통 리얼리즘의 감동을 재현한다. 한러 수교 20주년, 안톤 체호프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고전을 가장 정통적으로 해석하되 강력한 시청각 무대효과를 통해 현대의 시선을 삼투시킨다, 그러나 결국 모든 영광은 원 텍스트에 돌아간다. 지차트콥스키가 고전을 숭배하는 방식이다. 20일 제작발표회를 가진 그는 "체호프의 인물은 역동적, 사실적이다. 읽을수록 깊고 다양하다"고 전제했다.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등에 이어 체호프의 마지막 작품으로 자리잡는 이 연극은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봉건사회와 부르주아의 충돌상을 그린다. 그 양상은 코미디이자 비극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연출자의 시선이 특히 의미를 갖는 이유다. 지차트콥스키는 "고정관념은 깨져야 한다"며 무대ㆍ의상 디자이너 에밀 카펠류쉬의 사실적인 미술에 주목해줄 것을 요청했다.
현실이 힘들수록 미래에의 욕구는 강해지는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는 전략이다. 보통 40대 여인으로 그려져 왔던 여지주 라넵스까야는 거의 환골탈태의 지경이다. 지차트콥스키는 "그녀는 희망을 추구하는 여성성을 상징한다. 20대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성으로 그린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라고 말했다. 라넵스까야를 맡은 배우 이혜정은 "'갈매기' 이후 지차트콥스키와 두 번째 작업이어서, 그가 뭘 원하는지 충분히 안다"며 이심전심을 넌지시 비쳤다.
87세의 하인 역으로 나오는 신구는 "오랜 연기 생활 중 체호프에 출연할 기회는 그간 없었다"며 의욕을 표하고 "50여년 전 연극 입문기 때 워크숍으로 '갈매기'를 했지만 냉전 때라 실제 무대는 흐지부지했다"고 돌이키기도 했다. 상인 로빠힌으로 등장하는 장재효는 "실제 삶과 무대 간의 밀접성을 절감한 기회였다"며 활력 넘치는 리얼리즘 무대를 자신했다.
이 무대는 오는 11월 러시아 볼코프 국제연극페스티벌에 초청돼 현지 팬들의 평가를 받는다. 28일~6월 13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02)580-1300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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