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광주시와 하남시 그리고 성남시를 아우르면서 자리하고 있는 남한산성(사적 제57호)을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울러 남한산성 하면 바로 치욕의 역사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것은 조선시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한 산성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남한산성은, 인조가 도성을 버리고 들어와 45일간 항전하면서 끝내 무릎을 꿇었지만, 곰곰 생각하면 이곳 산성에서 꿇은 것이 아니라 지금의 송파구 삼전도에서 꿇었을 뿐이다. 즉 남한산성은 오랑캐의 발이 한 발자국도 침범하지 못한 곳이다.
간단히 남한산성에 대해 살펴보면 둘레는 총 11.75㎞에 이르고 높이는 낮은 곳은 3m에서 높은 곳은 7m에 이르며 4대문, 5옹성, 2돈대, 16암문이 마련되어 있고 우물 80여 곳, 연못 45개가 있어 물도 풍부한 성이다. 원래 백제의 옛 땅이었지만 신라시대에는 晝長城(주장성)을 쌓았고 조선에 와서 임진왜란을 당해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는 치욕을 당한 조선 조정이 왜란이 끝난 뒤 외적이 쳐들어 올 때를 대비해 인조의 명으로 2년 반 동안 대대적으로 수축해서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성내에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궁궐인 행궁과 아울러 종묘와 사직단을 마련해 국가비상시에 대비한 것이다. 결국 인조 때 청나라의 10만 대군이 한겨울의 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물밀듯이 침범해 왔다. 결국 인조가 도성을 버리고 이곳으로 옮겨 45일간 항쟁하지만 중과부적과 고사작전에 말려 삼전도로 나가서 항복을 하게 되었다. 인조가 비록 굴욕적인 항복문서에 조인했지만 그 내용 중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남한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남한산성이 난공불락의 성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조 임금이 성 밖으로 나가 항복은 했지만 위급할 때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쌓은 남한산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몸은 비록 항복했지만 정신과 나라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는 깊은 뜻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한산성의 역사를 항쟁과 사직보존의 역사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패배한 치욕의 역사로만 치부해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패배의 역사관이자 식민사관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구나 남한산성은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정한 후 성스러운 성산(聖山)과 진산(眞山)의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남한산성은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산성내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모든 시설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또 한번 당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인조 임금의 예에서 보듯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치욕스런 역사도 자랑스러운 항쟁의 역사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본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올바로 보는 눈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탓하기 먼저 우리 스스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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