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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큰파란바람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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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큰파란바람의 저녁

입력
2010.05.18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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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쉽게 땅에 발을 내려놓지 못하고 달아난다

강을 지나 일 년 내내 눈 쌓인 계곡을 지나

그러나 간단하게 뭉쳐지는 구름들 사이로

무섭게 직진하고 있는 태양의 기둥을 지나

벽을 뚫고

천 년 전에 만났다 헤어진 사람의 눈동자를 핥으며

지구를 만 년쯤 돌고 있는 바람이 이마에 와 닿을 때

국경을 넘어온 얼굴처럼 얼어 있는 저녁을 바라볼 때

나는 기둥, 이라는 제목의 나무

활엽에서 침엽으로 옮아가는 숲의 그늘

절벽 위에 서 있으면 어느 고원을 떠돌다 사라진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돈다

입술 튼 바람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전진하거나 융기하는

대륙의 저 끝에서 잠시 날개를 접고

녹아내리는 얼음을 밟으며 며칠 밤낮을 걸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함께 울었을 것이다

몇 달이 지나도 눈이나 비가 오는 숲에서

알을 품은 적 있는 둥지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나무 잎사귀가 다 떨어진 저녁

바닥에 누워 영원히 눈감는 자의 호흡은

처음 비행에 나서는 새의 눈빛처럼 새까만 것이어서

수없이 흔들리며 가라앉아 간다

입 벌린 채 마른 강을 건너가듯이

나는 갈증을 느끼며 파랗게 변해 가는 피부 속에

활공하는 바람의 말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람이 데리고 온 먼 곳의 먼지들은 낮게 휘돌다 단단해진다

● 어린 시절의 해 지는 저녁이면 자주 북서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죠. 고향집 가게에서 그쪽을 바라보면 병풍처럼 산들이 시야를 막았습니다. 구름들은 자주 바람을 타고 그 산들을 넘어왔죠. 어린 내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두껍고 높고 거대했을 산맥을.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또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침식하고 융기하는 구릉과 골짜기를. 그 산맥을 한 번도 넘어보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무엇이 그리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앉아서 뭔가를 그리워하는 흉내를 냈었죠. 이젠 뭐가 그리운지 다 알 것 같은데, 다 알 텐데도, 그냥 모르는 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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