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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46>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서의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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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46>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서의 봉사

입력
2010.05.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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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공직에서 물러나 대학으로 돌아온 뒤에도 정부가 위촉하는 사회활동에 계속 참여했다. 1992년 9월에는 노태우 정부의 통일정책고문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어 통일관련 정책에 관한 토의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이 회의는 통일원(현 통일부) 산하에 민관식 씨를 위원장으로 하여 박동진 박권상 백선엽 서정주 김옥균주교 등 원로 40여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나는 가장 젊은 나이여서 어울리지 않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남북통일 문제는 평소 나의 지대한 관심사일 뿐 아니라 나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맞는 참여 기회여서 이 회의에 빠짐없이 나갔다. 그런데 위원들의 의견이 대부분 너무 보수적이어서 남북 간의 화해 협력을 바라는 나의 의견은 항상 소수 의견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12월 20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정주영 두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93년 2월 25일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뒤 과감한 개혁이 시작되었다. 안기부와 기무사를 개편하여 정치에 관여치 못하게 하고, 4ㆍ19혁명과 5ㆍ18 광주 의거의 민주화운동 정통성을 인정했으며, 군의 하나회 제거조치로 군의 정치적 중립 질서를 세웠다. 그 뿐 아니라 청와대 주변 안가의 공원화와 개방, 국회의원과 장ㆍ차관 재산공개, 각종 사회적 비리사건의 조사 등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경제 질서를 투명하게 하기 위해 93년 8월 12일에는 드디어 금융 실명제를 단행했다. 금융실명제는 오래 전부터 시도했던 일이었지만 정치적 사회적 기득권 계층의 저항에 밀려 실패했던 사안으로서 이 조치의 결행은 역사적 의미가 큰 개혁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 해 4월 10일 나를 주택공사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나는 그 때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모르는 사이이다. 그 때 건설부 장관은 고병우 씨였고 주택공사 사장은 상공부 차관을 지낸 김동규(작고) 씨였다. 이사회는 신현식 중앙대 교수, 윤종안 동국대 교수, 김보근 전 건설부 기획관리실장, 이화영(작고) '국토와 건설' 사장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분들과는 지금도 자주 모임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사회가 해야 하는 일뿐 아니라 주택공사 전 직원들에게 경제문제 등에 대해 자주 교양강좌를 하였다.

그 때 잊히지 않는 일로는 주택공사의 주식회사 한양(漢陽) 인수 문제가 있다. 93년 초에 주식회사 한양이 건설경기 침체를 이기지 못해 약 2조원의 은행부채를 안고 부도를 냈다. 한양의 주거래 은행인 상업은행은 한양에 1조원의 채권을 가지고 있어서 한양의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부실기업인 한양을 정부가 주택공사에게 인수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긴급 이사회를 소집하여 주공의 한양인수는 특정 민간기업의 부실을 서민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라는 취지에서 부당하다는 내용을 의결하여 이것을 이사장 명의로 청와대 경제기획원 건설부 등에 보냈다. 이 때 경제부총리는 이경식, 재무부장관은 홍재형, 건설부 장관은 고병우, 경제수석은 박재윤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밀어 붙였다. 정부는 한양 부도로 인한 파급효과를 주택공사를 앞세워 차단코자 했던 것이다. 그 뒤 주택공사는 한양인수로 인해 부채가 누적되어 우리가 우려했던 바가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 뒤 1998년 2월에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 총리실 산하에 99년 4월 17일 자영업자 소득파악 위원회를 발족시켰는데 내가 그 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우리나라 서비스업체 수는 선진국에 비해 인구 대비 3배에 이른다. 음식점은 인구 80명당 하나이고 부동산 중개업은 인구 5백 명 당 하나이다. 그런데 이들 서비스업은 소득 자료가 부실하고 신고소득이 실제소득의 30%에도 미치지 못하여 조세 의료보험 국민연금 등을 부과하는 데 형평성에 큰 문제가 되었다. 서비스업 중에서도 변호사 의사 연예인 세무사 등 고소득자와 대형서비스 업체가 주로 문제였다. 김대중 정부는 의료와 연금 등 복지정책을 대폭 강화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에 앞서 이들 자영자들의 소득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위원회는 정경배 보건사회연구원장과 유일호 조세연구원장을 상임위원으로 하고 정부 각 부처와 학계 시민사회단체를 대표하는 26명으로 구성했다. 불광동의 보건사회연구원에서 매주 두 세 차례 모임을 갖고 집중적으로 논의한 결과 결론을 얻게 되어 그 해 연말 과세자료 확충에 초점을 맞춘 종합대책을 마련하여 이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 대책에서는 예금 보험 증권 부동산 등 모든 거래와 소득 자료의 국세청 제출을 의무화하고 국세청은 이를 전산화하여 필요기관에 제공토록 하는 특례법 제정을 건의했다. 그리고 이 대책에는 카드 사용의 촉진과 고액 자영업자에 대한 장부작성 의무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위원회 활동을 계기로 나는 자연스럽게 당시 김종필 총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총리실에서 몇 번 만났고 그 뒤 그 분은 총리 관저 만찬에 우리 위원들을 초대해줬다. 나는 그 분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인데 그 분은 인간적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총리실에서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였는데 처음 만나는 우리에게 걸걸한 목소리로 어려서 자랄 때 개구쟁이 노릇하던 구수한 얘기로 시작해서 친근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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