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했다. 강남의 패권을 다투는 사랑과 복수의 굵직한 서사는 잘생겼단 소리에 헤벌레 입을 벌린 임금의 코믹함 앞에 오금을 못 폈다. SBS의 새 월화드라마 '자이언트'가 10일 야심차게 출발했으나 뭉근히 끓어오르는 MBC '동이'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AGB닐슨미디어리서치가 집계한 11일 '자이언트' 시청률은 11.6%. '동이'(26.2%)의 절반에 미치지 못한 수치다. 무쇠솥에 든 온기 같은 '동이'의 인기가 서서히 월화드라마 독주체제로 굳는 듯하다.
밝고 가벼워진 사극의 인기
'동이'의 연출자 이병훈 PD의 작품에선 환한 에너지가 넘친다. '허준'(1999)부터 '이산'(2007)까지 이른바 '이병훈표'가 붙은 사극은 하나같이 경쾌한 리듬을 탄다. 방송계 안팎에선 그 밝고 가벼운 느낌을 '동이'가 경쟁작들을 따돌리고 멀찌감치 앞서가는 첫째 이유로 꼽는다. 대중문화 평론가 정덕현씨는 "요즘 시청자들이 드라마에서 얻으려는 것은 무엇보다 편안함"이라며 '동이'가 그 기호를 정확히 파고들었다고 분석했다.
'동이'의 배경이 되는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시대는 사극의 단골 무대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숙종의 여인들. 젓가락으로 입을 벌리고 사약을 떠 넣는 대목을 TV에서 보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동이'는 그런 어둑한 이야기와 멀다. 대신 돈키호테처럼 저자를 누비며 돼지껍데기를 자시는 명랑한 임금과 파스텔톤 후광을 발산하는 싱그러운 동이(한효주)가 화면 속을 누빈다.
정씨는 "'동이'는 왕의 캐릭터를 코믹하게 표현하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는데, 이것이 즐거움을 추구하는 시청자의 바람과 일치했다"고 말했다.
경쾌한 것을 바라는 시청자의 기호는 곧 '자이언트'가 부진한 이유이기도 하다. 고도 성장기 약육강식의 현실 속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가 '자이언트'의 뼈대. 그러나 시청자들은 더 이상 그런 묵중한 이야기에 쉽게 몰입하지 못한다. 거대한 흐름보다 일상의 소소함, 성공이나 복수 같은 인간의 굴곡보다 섬세한 감정의 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방송가에서는 "SBS가 시대와 코드를 잘못 읽은 결과가'자이언트'"라는 얘기도 나온다.
개방성에 비례하는 흡입력
이병훈 PD의 작품에선 일종의 기시감이 느껴진다. 언뜻 보면 허준이나 임상옥('상도')이나 장금이('대장금')나 모두 같은 느낌의 결, 다시 말해 전형성을 지닌 인물들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식상함을 느낄 새 없이 새로운 이야기에 끌린다. 정씨는 "이병훈 PD는 상당히 열린 자세를 지니고 있으며 시청자의 기호를 작품 속에 잘 반영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비슷비슷한 인물, 스토리로 느껴지지만 꼼꼼히 뜯어보면 서로 다른 색채를 띠고 있다는 설명이다.
'동이'에는 추리물의 요소를 많이 녹였다. 궁궐에 들어온 동이는 이런저런 사건에 연루되는데 그때그때 사건을 스스로 해결해 나간다. 시청자들은 이런 서스펜스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데, 이것은 CSI 시리즈나 '선덕여왕' 같은 드라마를 통해 배양된 시청자의 기호다. '동이'가 얻고 있는 인기는 이런 기호의 트렌드를 철저히 계산하고, 그것을 가벼움이라는 큰 틀 속에서 절제력을 갖추고 구현해 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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