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재정위기를 계기로 세계 환율구조에 대지각 변동이 오고 있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를 위협하던 유로화는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고, 이 덕에'늙은 사자'달러화는 오히려 회생하는 분위기다. 여기에 중국 위안화 절상이 임박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진다. 종래의 달러패권체제도 아니고, 달러-유로-엔화의 3축 체제도 아니고, 세계 통화질서는 그야말로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과연 격변의 와중에서 원화가치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
■ 유로화 '파티는 끝났다' 끝 모를 추락
유로화는 지금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17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유로화 가치는 1유로당 1.2273달러까지 하락해 지난 2006년 4월 이후 4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1999년 출범 이후 2008년 중반 한때 1.59달러까지 치솟으며 달러화의 기축통화 권좌까지 노리던 유로화의 기세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무엇보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에 드리운 총체적 위기감 때문. 이달 초 7,500억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안 발표 직후 잠시 상승 반전하는 듯 했던 유로화 가치는 지난주 들어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다. 그리스발 재정위기에 이어 재정적자 축소를 위한 유럽 각국의 긴축정책이 유로존 전체 경제회복을 발목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어느새 유로화는 '내던져야 하는' 통화가 됐다. 여기에 유로화 약세를 예상한 헤지펀드 등 국제 투기세력까지 환투기에 나서면서 하락세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위기감은 유로존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6일 연설에서 "(EU 등의 지원으로) 우리는 시간을 벌었을 뿐 회원국 간 경쟁력 및 재정 적자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도 같은 날 '유로 파티는 끝났다'는 기사에서 "그리스발 재정위기는 유로존을 넘어 전세계로 확산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락세는 단기간에 그칠 기세가 아니다. 스위스 은행 UBS는 지난 주말 보고서에서 "이 추세로 가면 유로의 대달러 가치가 내년에 유로당 1.10달러로 더 주저앉을 것"이라며 "이보다 더 떨어져 등가(1유로=1달러), 심지어 유로가 달러보다 더 싸지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달러 '구관이 명관' 위기 타고 상승
달러화는 '위기 때 빛을 발하는 통화'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때 위기의 진원지가 미국이었는데도, 신용경색으로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면서 전세계적으로 달러 부족 현상이 발생했고, 연방준비제도(Fed)는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과 달러화 스와프 조치를 맺었다. 위기를 일으킨 통화의 가치가 더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스 발(發) 유럽 재정위기가 발생하자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위협하던 유로화 가치는 폭락했고 달러화 가치는 올라갔다. 게다가 최근 미국 경제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각종 경제지표로 확인되고 있어, 달러 가치 상승은 좀더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주말 발표된 4월 소매매출과 산업생산 지표는 모두 시장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달러화 강세 덕분에 미국 정부는 싼 값에 국채를 발행해 경기부양책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천문학적 재정적자를 감안하면 장기적으로 달러화 가치가 계속 상승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많다. 안전자산 선호로 달러가 강세를 보이는 위기 국면이 지나가면, 그리스(115%)보다 훨씬 높은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140%)이 다시금 부각될 것이라는 견해다.
최근 달러화의 등락과 상관 없이 금값이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것도, 결국은 '모든 통화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럽이 현재 최악의 상황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펀더멘털이 좋은 것은 아니란 얘기다. 따라서 유럽 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된 후에도 달러화가 계속 강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며, 결국은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적자 감축 노력이 달러화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최진주기자
■ 위안화 절상 임박 '타이밍' 눈치
중국의 위안화 절상이 사실상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이르면 다음 주도 가능하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위안화 절상은 시기의 문제일 뿐, 그 자체는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 하지만 지난 10일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복수통화바스킷을 참고해 환율을 조정하는 관리변동 환율제를 적용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절상은 이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관리변동환율제로 가겠다는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위안화 환율을 달러화에 고정(1달러=6.83위안)시켜놓은 현행 페그제를 폐지하고, 환율변동폭을 넓혀 사실상 절상을 용인하겠다는 뜻. 실제로 중국은 지난 2005년 복수통화바스킷에 기반한 관리변동 환율제를 도입한 뒤 2008년까지 3년간 위안화 환율을 21% 절상한 바 있다.
최근 들어선 '조기절상론'이 더욱 힘을 받는 분위기다. 특히 다음 주(24~2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미ㆍ중 전략경제대화에 맞춰, 절상이 단행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지난 3월 위안화 절상에 대한 국제적 압력이 고조됐을 당시,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전략경제대화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일각에선 이번 미ㆍ중 전략대화가 아니더라도, 중국정부가 국제사회의 여론을 감안해 다음 달 부산 G20 재무장관회의에서는 입장을 밝힐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인도 프라납 무케르지 재무장관도 "중국이 환율 조작을 통해 수출을 제고한다는 세계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다음 달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위안화 절상을 시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최근 유럽 재정위기로 인한 금융시장 불안으로 조기 절상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되고 있어, 시기를 속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유로화 가치 하락으로 중국의 대유럽 수출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조기절상론의 변수가 될 것"이라며 "급격한 위안화 절상은 고용효과가 큰 수출기업에 타격을 줄 수 있어 중국당국은 3~5% 이내의 점진적인 위안화 절상을 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 원화 유럽 악재-수출 호재 '줄타기'
지난달 26일 원ㆍ달러 환율은 1,104.1원으로 1년7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 대비 절상률은 무려 5%에 달했고, 이는 주요 통화 중 최고 수준이었다. 외환시장에서 원ㆍ달러 환율은 곧 1,100원 밑으로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 달이 채 못 된 지금은 분위기가 바뀌었다. 17일 원ㆍ달러 환율은 지난 주말 대비 23.3원이나 폭등한 1,153.8원으로 마쳤다. 지난해 말 대비 절상률은 겨우 0.93%. 태국(3.0%)이나 대만(1.3%) 싱가포르(1.6%)에도 못 미친다. "상반기 내에 1,100원대가 깨질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던 전문가들도 "당분간은 1,100선이 깨지기 쉽지 않을 것 같다"며 말을 바꾸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무엇보다 유럽 문제가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판단 때문. 지난 주 유럽 재무장관들이 7,500억유로의 대규모 구제 프로그램을 제안했지만 이 프로그램이 채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고 각국의 부담이 더 커지면서 유로화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의견이 좀더 우세해졌다. 유로화가 추세적으로 약해진다면 달러화는 상대적으로 강해지게 되고, 원ㆍ달러 환율(원화약세)은 상승 압력을 받게 된다.
한 시중은행 딜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달러화 상승을 틈타 물량을 급하게 내놓던 수출업체들이 최근 달러화의 추가 상승을 기다리며 늦추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유럽 문제로 국제 투자자금의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강화되면서 우리나라나 중국 등 아시아 신흥시장에서 자금이 빠져나가는 것도 환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그렇다고 원ㆍ달러 환율이 1,200원대로 급등할 것으로 보는 견해는 많지 않다. 수출 호조가 계속되고 있고, 위안화 절상과 같은 환율 하락(원화가치 절상)압력도 있기 때문. 엄밀히 말하면 절상과 절하압력이 팽팽히 맞서 있는 상황이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