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ㆍ3인천대회로 수배되기 이전인 85년 9월께부터 피신하고 있었는데, 피신 초기에는 동가식서가숙 했으나 86년 1월께부터는 김희선 씨의 소개로 그의 친척집에서 지냈다. 방 2개의 13평 연탄아파트였는데,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살고 있어 내가 함께 살기엔 무척 불편한 집이었다. 그 댁에 불편을 덜 드리려고 밤늦게 들어와 잠만 자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어쩌다 그 댁에서 식사를 한 일도 있는데 반찬이 너무 부실했다. 나도 결코 좋은 음식을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닌데도 그 댁 반찬으로는 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오죽하면 그 댁에 있다가 서울구치소로 갔더니 서울구치소의 반찬이 진수성찬으로 보였을까. 구로연대파업으로 구속된 효성물산의 김영미 노조위원장이 구치소에서 밥과 국에 찬이 3개인 식사를 하면서 부모님이 잡숫는 것에 비하면 진수성찬이어서 목이 메었다고 말하는 걸 듣고서 동병상련의 느낌을 가진 일이 있는데, 이 댁의 반찬도 그런 느낌을 갖게 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5ㆍ3인천대회 후 지명수배는 됐어도 할 일은 다 하던 때라 보안과 관련해선 방심하는 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부영 선배를 만나러 전병용씨 집에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이 선배 집을 도청한 모양이었다. 전병용 씨 집에 들어가 잠시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건장한 사내 10여명이 들이닥쳤다. 안기부에서 왔다며 신분증을 보자고 해 변조한 신분증을 꺼냈으나 이미 나를 알고 들이닥친 만큼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때 민통련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던 김정남 씨의 주민등록증을 변조해서 갖고 있었다.
안기부로 연행되어 가는 동안 여러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런데 남산 안기부 건물 가까이 오자 갑자기 '고개 숙여'하며 내 머리를 아래로 눌렀다. 순간 화도 나고 또 그들의 요구대로 따르기도 싫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저항했다. 그랬더니 강제로 고개를 숙이는 과정에서 주먹다짐이 오고가 차 안이 난장판이 됐다. 사무실에 끌려 들어가서까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책상을 걷어찼더니 젊은 사내들이 달려들어 포승으로 나를 결박했다. 어차피 당할 일인데 고분고분 당하기는 싫었다.
한참 후 포승을 풀고는 나를 조사도 않고 경찰에 넘길 태세였다. 의외였는데 안기부가 조사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래서 간단한 신원조사를 끝낸 후 곧바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넘겼다.
대공분실에서도 5ㆍ3인천대회와 관련해서는 공개된 집회인 데다 내가 조사받기 전에 이미 거의 모든 사실이 조사되어 있어 꿰어 맞추기만 하면 됐다. 다만 내가 피신해 있었던 곳은 조사했다.
피신처를 물어 계훈제 선생 댁에 있었다고 말했더니 믿지 않았다. 경찰이 초소까지 지어놓고 감시하는 집에서 어떻게 피신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끝까지 우기다가 피신시켜준 사람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기로 하고 피신해 있던 집을 밝혔다.
검찰로 송치됐는데 조사를 거부했다. 검찰조사만 거부하는 게 아니라 재판을 거부할 작정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아보았는데 군사독재정권의 폭력적 탄압을 합법화하는 절차일 뿐이었다. 정의의 실현은 고사하고 엘리트로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포기하고 사는 판사나 검사들에게서 실체적 진실을 가리고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을 기대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조사 거부에 대해 담당검사인 정모 검사가 온갖 논리로 설득하다가 마침내 수사기록의 서명란에 내 이름만 쓰라고 했다. 그것마저 거부했더니 결국 나의 피신을 도운 사람들을 구속하겠다고 협박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지만 설사 그렇게 하더라도 이미 재판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재판절차에 응할 순 없었다. 기어이 내 이름도 쓰지 않은 채 기소되었는데, 며칠 후 나의 피신을 도운 김희선씨와 김정남씨가 구속되었다. 범인은닉죄로 두 사람이나 구속되는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김희선씨는 여성권익 보호단체인 '여성의 전화' 총무를 맡고 있는 유능한 분이었으나 여성운동가로서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었다. 서울구치소에 구속되어 그곳에서의 민주화투쟁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출소 후 민통련 활동을 거쳐 평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됐는데, 나로 말미암아 구속된 게 국회의원이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김정남씨는 미장일을 하는 노동자로 평소 민주화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으며 '동교동계'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다. 그래서 정치권에 친한 사람이 많은데도 관직을 탐하는 일 없이 오직 미장일에만 열심이었다. 진정으로 순수하고 정의로운 민주시민이었다. 1983년 민통련의 전신인 민주·통일 국민회의의 사무실 임대보증금 50만원을 우리에게 빌려주었다가 끝내 돌려받지 못한 채 작년에 작고하고 말았다. 5월 26일이 1주기인데 추도의 말로 빚을 갚아야 할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서울구치소에 구속되었는데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사람이 많은 데다 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열기도 높아 서울구치소 안에서도 민주화투쟁이 활발했다. 이른바 '샤우팅'이라 하여 아침저녁으로 일제히 '전두환정권 물러가라', '좌경용공 탄압말라', '양심수를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젊은 사람들이 중심이 돼 '민주화촉구 전국옥중투쟁연합'을 결성해서 문익환목사를 의장에, 나와 민종덕, 오수진을 부의장에 추대하기도 했었다. 구치소 당국에서는 내가 이것을 조종한다고 보고 나를 일반사동과 많이 떨어져 있는 병사(환자들을 수용하는 사동)로 옮기고는 내 방 앞에 담당 한 명을 더 배치했다. 재소자 한 사람에게 담당 한 명을 별도로 배치하는 일은 지극히 드물었다. 나의 교도소투쟁경력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서울구치소의 부소장이 몇 년 전 내가 대구교도소에서 재소자권익투쟁을 전개할 때 부소장으로 있던 분이라 지레 겁을 집어먹은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는 엄청 좋은 기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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