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인파 속에 놀면서 제일가는 사람과 벗을 삼지 못하면 선비가 아니다. 자신이 제일가는 선비가 된 다음에야 제일가는 사람이 찾아오는 법이다. 제일가는 사람과 벗을 삼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 제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제일이라 하는 것도 한 가지가 아니다. 문장의 분야에서 제일가는 것도 제일이고, 재주 중에서 제일가는 것도 제일이고, 말을 잘하는 것도 제일이니, 제일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모두 내가 말하는 제일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제일은 오직 덕이 제일가는 것과 학문이 제일가는 것이다."(신흠;《국역상촌집 》제39권 《잡저(雜著)》 )
상촌 신흠의 교우론은 벗 사귀는 도리와 함께 글쓴이의 사람됨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글이다. 이 글은 그 벗을 사귀고 벗이 되는 도리와 함께 스스로의 사람됨을 성찰하는 교우론이다. 그것은 "제일가는 사람과 벗을 삼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 덕과 학문에서 제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 속에 드러나 있다.
신흠은 스스로 문장으로 혹은 하는 일로 사귄 벗이 모두 당대의 명류들이었다고 하면서도, 특히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한 사람만을 들어 그와의 사귐을 소중히 한 사람이다. 신흠이 이항복을 위해서 쓴 다른 글에서는, 두 사람이 한 번 보고 곧 망년지우(忘年之友)가 되었으며, 마을을 마주하고 30년을 살았다고 했다. 망년지우는 나이의 차이를 잊고 친구가 된 사이로, 백사 이항복은 신흠보다 열 살 손위였다. 신흠은 스스로 스승을 삼을 만한 곳이 없었다고 자주 말해온 사람이지만, 백사와는 서로 말을 나누지 않고도 생각이 같은 때가 많았고, 만년에는 한층 더 뜻이 맞았다고 했다.
신흠이 이항복을 위해서 쓴 글로 은 6,200자 가까운 대 장편의 규모에다, 그 격조에서도 단연 압권이다. 영의정을 지낸 백사를 돌에 새기는 첫마디부터 이 글은 "임진왜란에 명나라 원군을 요청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시 찾게 한 신하"라고 평했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이이첨 등이 강토를 도탄에 빠트렸을 때는 큰 소리로 고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 신하였다고 했다. 그는 백사 밖에도 장유(張維, 1587-1638)와 이정구(李廷龜, 1564-1635)와 이수광(李晬光, 1563-1628)과도 친했으나 백사와 같지 않았다.
우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가 있어야 한다. '내'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사람의 벗이 될 수 있다.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중국과 한국에는 이런 '자기'가 있는데, 일본에는 '사회'만이 있고, '자기'가 없어서 우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柄谷行人;《윤리 21》, 송태욱 옮김)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한 뜻일테지만, 타산지석을 삼을 만하다. 18세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의 에 쓴 박지원(朴趾源)의 머리말에는 "그 벗 삼는 바도 보았고, 그 벗 되는 바도 보았으며, 내가 벗하는 바를 그는 벗하지 않음도 보았다"고 했다. 교우론의 전통을 가늠할 수 있다.
동국대 명예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