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김수환 추기경께서 천상의 세계로 가시며 보여주신 모습은 세속의 많은 이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추기경이라는 자리에서 한국 천주교의 중심에 계시면서도 돌아가실 때까지 항상 '나는 누구인가?' '정말 나는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가?'하며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은 구도자의 모습이 종교를 떠나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종교적 삶은 뒷전인 채 신학지식의 추구가 곧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예수가 언제 자기를 연구하라고 했는가, 자기를 따르라고 했지'하는 정문일침(頂門一鍼)의 명징한 말씀으로 종교적 삶의 핵심을 가르쳐 주셨다. 영성을 추구하며 참된 길을 실천하신 분의 힘이다.
말과 지식을 넘어서는 자기 성찰
올해는 불교계의 법정 스님께서 돌아가시며 생전에 당신께서 쓰신 책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승에서 진 '말의 빚'을 모두 거두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시고자 했을지 모르지만, 이는 깨달음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에게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스님이 타계하신 후에 속세의 사람들은 스님의 수필집 를 사겠다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경매사이트에 고가로 등장하곤 했다.
아마 스님이 속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이렇게 말씀했을 것이다. "부처가 언제 '무소유'를 소유하라고 했는가, 소유를 하지 말하고 했지." 그렇다. 무소유의 가르침이 그렇게 울림이 컸다면 의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그냥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 쉬운 것부터 손에서 내놓으면 될 일이다. 부처의 길은 부처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간 길에 한 발짝 내디디며 그 길을 따르면 된다.
그러나 세속에 살며 욕망의 체계에 갇혀 있는 인간이 예수의 길을 따르거나 쥐고 있던 것을 놓기보다는 예수를 연구하고 부처를 탐구하는 일이 더 쉽고 편할지 모른다.
최근 한국 불교계에서 참선보다 불교의 경전 공부에 더 비중을 두겠다고 하여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참선에만 치중할 경우에는 자칫 신비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고, 실제 불교가 무엇인지, 부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선종(禪宗)에서 '깨친다'는 것은 인식과 존재의 문제다. 그러기에 조사도 죽이고 부처도 죽인 살조살불(殺祖殺佛)의 경지에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선가의 논리가 가능하다.
인식과 존재의 문제는 동서양 철학에서 수 천년 동안 다뤄온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있고 논구들이 많다. 그렇기에 공부를 않고 일반인이 이 문제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이를 '무(無)',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이 뭣고?(是甚麽)', '앞 이빨에 털 났다(板齒生毛)' 등의 공안(公案)만 들고 터득하기는 너무 어렵다. 그래서 궁극에는 문자도 떠난 경지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도, 현실에서 세속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법정 스님의 수필을 읽으면서 부처의 길을 조금씩 생각하고 깨달음의 길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 더 실감 있을지 모른다.
인식과 존재에 대한 깊은 가르침
인식과 존재의 문제를 꿰뚫는 일을 간화선(看話禪)이나 묵조선(黙照禪)의 방법으로 할 수도 있으나, 법정 스님과 같이 현실의 구체적 현상이나 상황에 바탕을 두고 쓴 글을 통하여 접근하는 것이 일반인에게는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에 더 쉬울 수 있다. 책을 없애 버리라는 것이 불립문자의 가르침을 준 것임에도 현실에서 사람들이 애써 수필집을 사서 읽으려는 것은 차라리 부처의 가르침을 얻는 길이 불리문자(不離文字)를 떠나서는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 불교의 상황을 보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한국 불교의 위대함이고 한국 불교의 정맥을 유지해 주는 생명이다. 그러나 불리문자를 가볍게 보면, 궁극에 활구참선도 형해화 버릴 수 있다.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이 오셨다'는 말의 의미를 찬찬히 볼 일이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새사회전략정책硏 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