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하딩 지음ㆍ이순희 옮김/부키 발행ㆍ351쪽ㆍ1만6,000원
다양해지는 개인들의 기호, 새로운 미디어의 발달, 복심을 드러내지 않는 유권자들. 이처럼 복잡한 변수들 속에서 대중의 심리를 꿰뚫고 그것을 깊숙이 파고드는 정치적 메시지를 구상하는 정치 컨설턴트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예컨대 2004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부시의 책사였던 칼 로브 같은 이는 '공동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당당한 위세를 과시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제임스 하딩은 2004년 미국 대선을 취재하던 중 칼 로브를 만났고, 오늘날의 선거에서 정치 컨설턴트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증을 품게 됐다. 정치 컨설턴트의 역사를 추적하다보니 에둘러 갈 수 없었던 것이 다국적 정치 컨설팅 그룹의 원조 격인 소여 밀러 그룹. 저자는 이 그룹의 흥망성쇠를 추적하며 정치 컨설턴트들이 어떤 식으로 현대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1978년 설립돼 1990년대초까지 활동했던 소여 밀러 그룹의 창시자는 미식축구 선수를 꿈꾸다 부상으로 꿈을 접고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생활을 하던 스콧 밀러와, 연극배우를 지망하다 기록영화 제작자의 길을 걷던 데이비드 소여. 이들은 1970년대말 유권자들의 표심의 결정적 변수로 떠오른 텔레비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이미지를 중시하는 선거운동과 교묘한 네거티브 공세 등 '미국식 미디어 정치'를 대표하는 기법들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남미에서 에콰도르와 페루, 아시아에서 필리핀과 한국, 유럽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이 소여 밀러 그룹의 고객이었다. 비록 미국의 대통령은 당선시키지 못했지만 이들은 한국의 김대중,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의 대선 승리에 기여를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임스 하딩은 세계 각국에서 벌어진 각종 선거에서 소여 밀러 그룹이 어떻게 유권자들을 움직였고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했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예컨대 이들이 1986년 코라손 아키노를 지원해 당시 미국 레이건 정권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던 마르코스를 무너뜨리는 과정은 극적이다. '피플 파워'로 상징되는 국민들의 지원이 있었지만 아키노는 국가통치의 지식도 경험도 없는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다. 말투는 어색했고 천성적으로 인신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정치인으로서는 결격사유가 많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소여 밀러 그룹은 노하우가 있었다. 마르코스가 아키노의 통치능력 문제를 거론하자 아키노로 하여금 마르코스의 건강 문제를 물고 늘어지게 했고, 집요한 질문을 하는 기자 출신의 인물을 아키노의 연설교사로 붙여 자신있고 간결한 어조로 인터뷰에 응하고 유세하는 방법을 훈련시켰다.
아키노의 성공에 자신을 얻은 이들은 1986년 서울에서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김대중과도 은밀히 접촉했다. 소여 밀러 그룹은 끊임없이 여론조사 결과를 알려주고 가두 유세와 언론사 인터뷰, TV토론회에 사용할 답변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등 김대중이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지원했고, 단순한 정치 컨설턴트가 아니라 '민주화의 지원군'으로도 명성을 얻게 된다.
저자는 소여 밀러 그룹의 성공은 "현대 정치의 본질_즉 본질에 대한 스타일의 승리"를 표상한다고 갈파한다. 정당의 정강보다 선거운동 광고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투여하고, 정책가보다는 선거본부의 홍보 담당자가 더 중요한 인물이 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제 소여 밀러 그룹이 중시했던 이미지 메이킹의 시대는 흘러갔지만 정치 컨설턴트의 역할은 여전하리라고 전망한다. '이미지 메이킹' 대신 유권자 개개인의 성향을 파악해 세분화된 메시지를 만들고, 정밀한 계획에 의해 유권자와 접촉하는 '데이터베이스 정치'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책 제목으로 쓰인 '알파 독(alpha dog)'은 망을 보는 개의 무리 가운데 전체 상황을 통제하고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는 개를 의미한다. 현대 정치의 주인공은 어쩌면 유권자가 아니라 선거 전략을 짜는 정치 컨설턴트일지 모른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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