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낮 국립5ㆍ18민주묘지. 칠순을 넘긴 늙은 어미는 큰아들 무덤 앞에 앉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늘어진 어깨가 힘없이 가늘게 흔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아들 이름이 섞인 흐느낌을 바뀌었다. 그러나 어미의 울음은 이번에도 위로받지 못했다. "내 이름은 묻지도 말고, 아들놈 이야기도 (신문에) 쓰지 말어. 내 아픈 기억을 끄집어 내면 도와주는 것이여." 퀭한 눈가에 번진 눈물을 훔치며 힘없이 일어서던 그의 표정엔 잊혀진 5ㆍ18민주화운동에 대한 설움과 원통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30년. 그 기나긴 세월의 물살을 5ㆍ18도 거스르지는 못했다. 5월 피해자 가족들은 여전히 그날의 상처에 다시 생채기를 내며 마르지 않는 눈물을 쏟아 내지만 세상은 그 눈물로 기억을 지우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피로 얼룩졌던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그때의 참상을 알리는 수많은 사진과 걸개그림들이 내걸렸지만 올해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5월 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참배객들의 추모 행렬도 과거 같지 않았다. 5ㆍ18이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진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5ㆍ18을 향한 불편한 시선에 진실이 묻혀 가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5ㆍ18 당시 북한이 간첩을 보내 시위를 조장하고, 북한군 특수부대가 학살을 자행했다고 하는데 그럼 내가 그때 북한의 사주라도 받았다는 말입니까." 5ㆍ18 부상자 김범동(64)씨는 최근 5ㆍ18을 좌익 난동으로 왜곡하는 일부 극우 세력들의 억지 주장에 치를 떨었다. 그는 "시민군을 폭도로 매도하고 북한군 개입을 기정사실화하는 내용의 글들이 일부 보수 인사ㆍ단체의 인터넷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며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 후 한국 사회의 전반적 보수화 흐름을 타고 5ㆍ18 왜곡이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렇다 보니 광주에서조차 "또 5ㆍ18이냐, 이젠 제발 그만 하자"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 실제로 시민들 사이에선 "(가산점 혜택이 있는) 5ㆍ18 유공자 자녀들이 많아서 광주에서 공무원시험을 치르기도 어렵다" "광주교대 입학은 꿈도 꾸지 마라" "지금껏 여섯 번이나 5ㆍ18 보상금을 타고 연금도 받으면서 무슨 볼멘소리냐"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고 있었다.
"5ㆍ18 유공자요? 말이 좋아 유공자지 다른 유공자들과 달리 연금은 한 푼도 못 받고 있어요. 보상금도 지금까지 여섯 차례 숨은 유공자를 찾아내 보상한 것이지 여섯 번씩 중복 지급한 게 아니에요. 배상금이 아니라 보상금인 것도 억울한데…." 5ㆍ18민주유공자단체 통합추진위원회 허연식 간사는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진실처럼 퍼져 있어 서글프다.
그래서일까. 역사와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는 5ㆍ18을 되살려 내야 한다는 5ㆍ18 유족과 유공자들의 바람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5ㆍ18 유족 이모(70)씨는 "5ㆍ18이 왜곡되고 광주 시민들에게까지 오해받는 상황이 온 것은 5월이 잊혀져 가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더 이상 5월 광주가 왜곡되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루 빨리 5ㆍ18이 과거가 아닌 역사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광주=안경호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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