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부류인가. 매력적인 모델이 등장하는 패션화보를 볼 때 그저 정신을 빼앗기는가, 아니면 화보 어딘가에 부착돼있을 표식을 찾는가. 다소 엉뚱한 질문일 수 있으나 전자라면 당신은 과거를, 후자라면 미래를 살고 있을 공산이 크다. 스마트폰시대는 패션이 소비자와 소통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그건 단순하게는 디지털마케팅의 진화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패션의 역사가 파리와 뉴욕 밀라노 등에 부여했던 트렌드 발신지의 우월적 지위를 박탈하고 패션과 유통의 종속적 관계를 해체할만큼 혁명적이기도 하다.
제일모직은 최근 캐주얼브랜드 빈폴진 마케팅을 위해 인기 걸그룹 '2NE1'이 등장하는 증강현실 광고를 제작, 발표했다. 증강현실(ARㆍAugmented Reallity)은 실제 영상에 가상 물체가 겹쳐 보이도록 표현하는 기술로 그간 온라인 공간에서 구현됐던 가상현실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보인다. 카탈로그나 웹사이트에서 내려받은 AR카드를 모바일폰이나 컴퓨터에 장착한 웹캠에 비추면 3D 입체영상이 뜨면서 2NE1 멤버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빈폴진 상품을 소개하고 소비자에게 말을 거는 등 마치 같은 공간에서 서로 대화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증강현실을 광고에 도입하는 것은 제일모직이 처음은 아니다. 이탈리아 캐주얼브랜드 베네통과 미국 캘빈클라인언더웨어도 지면광고를 통해 증강현실을 이용해 모델들과 소비자들이 소통하는 가상경험을 제공한다.
디지털시대 패션의 미래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는 지난 3월 열린 도쿄걸스컬렉션이다. 행사장에 몰린 2만여명의 관객들은 모델의 워킹을 지켜보며 즉석에서 휴대폰을 통해 패션쇼핑에 나섰다. 주최측인 걸스워커닷컴(girlswalker.com)이 패션쇼가 시작하기 전 모델이 입고 나올 옷을 홈페이지에 올려 쇼 관객들이 모델의 실제 입은 옷을 보면서 바로 구매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 덕이다.
패션의 역사에서 패션과 소비자는 늘 한두 다리를 건너야 비로소 소통할 수 있었다. 패션정보를 제공하는 매체와 패션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유통망 등이다. 산업사회에서 물자가 생산, 유통되는 과정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매년 봄여름과 가을겨울 시즌으로 나뉘어 1년에 2번씩 패션컬렉션이 열리는 패션시스템도 산업사회의 유물이다. 파리와 뉴욕을 패션중심지로 부상시킨 패션컬렉션은 19세기 중반 일일이 맞춤옷을 만드느라 시간을 허비하느니 시즌별로 몇 개의 샘플을 제작하고 이를 통해 주문생산 방식을 채택한 프랑스 오트쿠틔르의 창시자 찰스 프레드릭 워스(Charles Frederic Worthㆍ1826~1895)의 선견지명 덕이었다. 그러나 정보화시대 세계는 지구촌을 넘어서 하나의 공간으로 압축되고 있다. 버버리가 지난 2월 런던에서 연 2010가을겨울 컬렉션은 파리와 뉴욕 두바이 도쿄 등에서도 3D영상과 3D안경을 통해 마치 실제로 런던쇼장에 있는 듯한 효과를 연출했다.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는' 유비퀴터스 세상의 구현이라 할 만 하다.
버버리의 동시다발적인 소통과 도쿄걸즈컬렉션의 즉석구매 방식이 합쳐진다면 어떨까. 패션제조업체와 소비자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동시에 접속해 패션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이 전통적으로 유통업체에 종속적이었던 국내 패션업계가 모처럼 주도권을 쥐는 기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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