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62) 시인은 재작년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이창동 감독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디 강연 가는 곳 있느냐"는 이 감독의 질문에 김씨는 "대구"라고 답했다. 이 감독의 스태프는 대구에 찾아와 김씨의 강연 모습을 캠코더에 담아갔다. 그리고 1년이 지나, 김씨는 이 감독으로부터 '시'란 제목이 달려 있는 시나리오 한 편을 받았다.
시나리오에는 시인 '김용탁'이 등장하고 있었다. 김씨는 "시를 다룬 내용이니 처음엔 의견을 듣기 위해 보낸 시나리오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12일(현지시간) 개막한 제63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시'에는 눈길을 잡는 이색 출연자들이 많다. 김씨를 비롯해 MBC 사장 출신의 국회의원 최문순, 시인 황병승씨 등이 등장한다. 이들 중 분량으로 보나 비중으로 보나 김씨의 역할이 많고 크다. 그는 영화 주인공인 60대 여인 양미자(윤정희)가 찾아간 문화원 강좌에서 시 강의를 하는 김용탁을 연기했다.
서울 태평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씨는 "나중에 편집하며 많이 자르겠지 생각했는데 시나리오대로 다 나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다가 '평소 모습처럼 행동하면 된다'는 이 감독의 말에 출연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사실 김씨는 소문난 영화광이다. 등 두 권의 영화에세이집도 냈다. 그런 그에게도 막상 영화에 출연한다는 건 진땀을 빼는 과정이었다. "청중이 많으면 많을수록 힘이 나고 2,000명 앞에서도 강연을 해봤"지만 "카메라 앞에만 서면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그는 "미자와 술자리에서 만나는 한 장면만해도 오후 5시에 시작해 다음날 오전 5시가 되도록 찍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밝혔다. "글을 쓰며 알게 된 이 감독 앞이니 몸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음에 또…"라고 운을 떼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시'에는 "시는 죽어도 싸"라는 직설적인 대사가 나온다. 만취한 황병승 시인의 입을 통해서다. 김씨는 "내 마음을 날카롭게 찌르는 그 대사에 나도 동의한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시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시대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시라는 것이 느리고 더디게 감동을 주는 것인데 빠르기만 한 이 시대에 어울릴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요즘 시대엔 영화가 더 어울리죠. 박찬욱, 봉준호 감독 같은 분이 영화를 안 만들었으면 훌륭한 소설가가 됐을 텐데, 이런 분들이 시나 소설을 쓰는 대신 영화계로 가버렸죠."
그는 '시'를 촬영하면서 시인으로서의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했다. "시인으로서 이 시대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반성했고 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2년 전 초등학교 교사를 정년퇴임한 그는 요즘 팔도를 유람하다시피 하며 강연을 다니고 있다. 한 달에 15곳에서 강연요청이 올 정도로 인기다. "웬만한 시ㆍ군은 다 돌아봐서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이 일을 잘하는지 알 정도"라고 했다. 저술 활동도 꾸준한데, 내년 출간 목표로 그동안 써왔던 산문을 정리한 7권짜리 전집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내년이면 새 시집도 발표할 생각이다. "학교를 퇴직하고 나니 훨씬 여유롭습니다. 오전 4시에 일어나 신문 보고 글 쓰고 운동합니다. 오후엔 영화나 그림 보러 다니고요. '시'는 참 좋은 영화입니다. 아! 한 번 더 봐야 하는데…"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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