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보육시설 '1%의 행운' 잡고 아이 둘 더 낳았어요"
결혼 13년차 간호사인 김현정(38)씨는 자식을 넷이나 둔 워킹 맘이다. 김씨는 2001년 남녀 쌍둥이를 낳고는 덜컥 겁이 낳다. 남편과 맞벌이를 하는 김씨가 아이를 믿고 맡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 용인시 집 근처에 사설보육시설이 있기는 했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결국 김씨는 아이들을 경북 포항시의 친정에 보냈다. 주말에만 아이들을 만나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일에도, 육아에도 집중하기 힘들었다. 병원에서 일할 때마다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반대로 연월차휴가를 내고 쌍둥이 곁에 있으면 못다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
김씨는 할 수 없이 아이들을 집 근처의 사설보육시설에 보냈다. 그러나 보육 환경이 국ㆍ공립이나 직장보육시설에 비해 열악했다. 아이를 맡아 주는 것 외에는 별다른 교육 프로그램도 없었는데도 소풍 등 명목으로 엄청난 추가 비용을 내야 했다. 외부에서 반입되는 음식을 먹고 아이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1%의 행운, 직장보육시설
그러던 김씨에게 대안이 생겼다. 일터인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이 1999년 만든 직장보육시설을 2007년 1,422㎡ 규모(지상 3층ㆍ지하 1층)의 독립 건물로 이전해 234명 원아를 수용할 수 있게 확장한 덕분이었다. 직장보육시설 중 아주대병원처럼 독립 건물을 갖추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위탁운영도 강남대 유아교육과가 했다. 전문 교육을 받은 교사들이 아이들을 맡아 보육뿐 아니라 교육까지 병행하니 만족도가 높았다. 소속 영양사가 식단을 짠 뒤 직접 만든 음식을 먹여 아이들이 탈 나는 일이 없어졌다. 사설보육시설처럼 추가 비용도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얻은 김씨는 이후 아들을 둘 더 낳았다. 김씨는 병원 근무가 시작되기 직전 아이를 맡겼다가 밤이 되면 찾아간다. 김씨는 "일을 하다 언제든 아이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직장보육시설의 가장 큰 장점"이라며 "직장에서 이름을 걸고 하는 보육시설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아이를 더 가질 엄두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씨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다. 2009년 보건복지부 보육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전체 보육시설 가운데 직장보육시설은 350개(1%)뿐이고 국ㆍ공립보육시설도 1,826개(5.5%)에 불과하다. 반면 사설보육시설은 1만4,275개(42.6%), 가정보육시설은 1만5,525개(46.3%)에 이른다. 근로복지공단은 2004년부터 직장보육시설 설치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2009년까지 6년 동안 설치비를 지원받은 기업은 93개, 예산은 88억2,200만원에 그쳤다. 기업들이 운영비 부담 때문에 건설을 꺼리는 것이다.
이은애 근로복지공단 재정복지이사는 "올해 189억원을 투입해 50개 직장보육시설 설치를 지원할 예정"이라며 "여성 근로자를 많이 채용해 운영하는 기업들이 이 제도를 알면서도 활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30분의 여유, 탄력근로제로 모성보호
직장보육시설을 갖췄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야간 근무나 2, 3교대로 일하는 여성 근로자에게 낮 시간에만 운영하는 직장보육시설은 그림의 떡이기 때문이다. 직장과 집의 거리가 먼 워킹 맘에게도 직장보육시설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결혼 8년차인 김주영(34)씨는 2007년 첫 아이를 가진 뒤로 출근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메스꺼움과 구토 증세가 심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은 더욱 그랬다. 하지만 아직 배도 불룩하지 않은 그에게 누구 하나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그가 다니는 유한킴벌리는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출근 시간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법정출산휴일인 90일 외 산전휴가 2개월을 추가로 사용하고, 사무실 내 모성보호실에서 모유 수유도 할 수 있었다. 불임 해결을 위한 1년 휴직제도도 있었다.
김씨는 출근 시간을 9시에서 9시30분으로 늦춰 복잡한 지하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출산 후에도 자신이 선택한 출근 시간을 유지해 아이에게 아침을 먹이고 보육시설에 바래다준 뒤 나온다.
그는 "30분의 여유가 큰 힘이 됐다"며 "아침 황금 시간의 교감이 나와 딸에게는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다"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 "모성 존중 기업문화 정착이 우선"
서울의 한 은행에서 근무하는 나승연(가명ㆍ32)씨는 지난해 8월부터 육아휴직 중이다. 다른 직장보다 훨씬 긴 2년을 육아휴직으로 쓸 수 있어 혜택을 보고 있지만 나씨는 "복직만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고 한숨을 짓는다.
2년이 지난 후에도 아이는 아직 미숙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출퇴근 시간이 칼 같고 조직 문화가 딱딱한 편인 은행이라 탄력근무제를 활용하기가 껄끄럽다. 아이를 이유로 연월차휴가를 내려고 해도 눈치가 보일 게 뻔하다. 은행은 최근 3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직장보육시설을 갖추기는 했지만 집에서 1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를 러시 아워에 아이를 안고 이동한다는 것도 여의치 않다. 나씨가 둘째 출산 계획은커녕 복직조차 고민하는 이유다.
워킹 맘에게 직장보육시설이나 모성보호제도, 지방자치단체의 출산장려금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배려하는 모성 존중의 기업 문화다.
연봉 높은 대기업에 다니다가 육아휴직 중인 선예진(가명ㆍ33)씨도 일과 육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선씨의 회사는 직장보육시설을 갖추고 있고, 주소지가 있는 지자체에서 출산장려금을 주지만 그는 "시설과 돈이 다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일단 육아휴직를 마음 놓고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며 "눈치 보며 육아휴직을 갖다 온다 쳐도 일하던 자리에 돌아가지 못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남편들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기업에서 탄력근로제를 이용해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는 이시영(32)씨는"남편의 직장도 대기업이라 같은 탄력근로제도가 있지만 상사 눈치가 보여 마음대로 나올 수가 없다고 한다"며 "아이 생일에 오후 8시께 퇴근하려다가 '자네는 퇴근하려고 출근하나'라고 핀잔만 들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 기업의 평가보상제도가 제대로 이뤄져야 워킹 맘이 육아를 포기하고 일만 선택하는 병폐를 줄일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씨는 "상사 눈치 보느라 놀면서도 퇴근은 늦게 하는 조직 문화, 아부하는 사람이 승진하는 기업의 평가보상 체계가 근본적 문제"라며 "육아휴직을 하면 원하는 자리로 돌아갈 수 없고, 승진에서 배제되는 인사 관행 때문에 못된 엄마를 선택하는 워킹 맘이나 아이를 갖지 않는 기혼 여성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바람직한 기업 문화를 갖고 있는 회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유한킴벌리의 탄력근로제는 워킹 맘뿐 아니라 전 직원에 적용된다. 사무직은 7시에서 10시 사이에 자유롭게 출근 시간을 정할 수 있고, 영업직은 현장에서 출퇴근한다. 생산직의 자발적 제안에 따라 4조 2교대(4일 근무 4일 휴식)도 도입했다. 워킹 맘이 눈치를 보지 않고도 육아와 일을 양립하기 위해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분위기다.
걱정과 달리 일과 삶의 양립을 존중하는 기업 문화는 높은 효율성으로 이어졌다. 이 회사는 이런 제도를 도입한 이후 생산성이 2배 이상 향상됐고 산업재해율 0%를 달성했다.
손승우 유한킴벌리 PR실 부장은 "워킹 맘들이 편안해 하는 이유는 별도의 제도가 유효했다기보다는 인간 존중의 창업 정신이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기업 문화로 성숙한 덕분일 것"이라며 "워킹 맘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시설 제도 돈이 아닌 기업 문화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청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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