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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33> 최초발견 조선시대 벽화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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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33> 최초발견 조선시대 벽화무덤

입력
2010.05.1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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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서울 강남개발이 빠르게 진행될 무렵 조선시대 회곽무덤(灰槨墓)의 천정에 '성숙도' 즉 별자리가 그려진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으나 당시만 해도 고고미술사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더구나 후손들도 토지보상과 천장에만 신경 쓸 뿐 무덤이나 벽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벽화 무덤이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인식된 것은 2000년대 들어와서다. 그것도 함께 묻혀있을 유물에 눈독을 들인 도굴자에 의해 무덤들이 파헤쳐짐으로써 그리 됐다.

2000년 9월 16일 태풍 사오마이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상륙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히고 지나갔다. 이 태풍으로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밀성 박씨 문중 묘역의 박익묘의 봉토 일부가 내려 않는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간단히 생각하고 문중에서 보수하고자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태풍의 피해에 앞서 언젠가 도굴의 피해를 입었음을 알게 되었고 아울러 무덤 벽에 벽화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흥미를 끈 것은 도굴구덩이에서 꺼내온 비닐에 1987년 8월 17일 제조 년 월이 찍혀있어 도굴된 시기가 80년대 후반이었음 알게 되었다. 문중에서는 이러한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10여 년을 지내 온 것이다.

무덤 주인공인 박익은 고려말의 충신이었고 문장에 능했으며 본관이 밀성이며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 말의 중신인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등과 같이 고려말 두문동 8인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밀양으로 낙향하여 은둔생활을 하다 1398년 11월에 죽었는데 이 무덤은 그가 죽은 지 22년 후에 마련됐음을 지석 기록을 통해 알게 되었다. 벽화는 죽은 자를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장례행렬도라 할 수 있다. 무덤의 주인공인 박익이 비록 조선 초기에 죽었으나 그림의 내용은 다분히 고려적인데, 고려벽화에 보이는 12지상 대신 그려진 매화, 대나무가 그려졌다. 고려태조 왕건과 2대 정종의 무덤에서 이 그림이 발견된 것을 볼 때 박익의 고려에 대한 충절을 상징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몇 가지 수수께끼가 있는데 무덤 속에서 출토된 9개의 동전 가운데 1017년에 만들어진 당나라의 天禧通寶(천희통보)가 있는가 하면 가장 늦은 1408년에 만든 명나라의 永樂通寶(영락통보)가 있어 제조 연대가 무려 39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박익이 죽은 10년 뒤에 제작된 영락통보는 그가 숨진 지 22년 후에 이장할 때 함께 묻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박익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없고, 묘지석 없이 고분만 남아있다가 1017년 제조된 천희통보가 발견되었다면 이 무덤은 11세기 무덤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고고학적인 해석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보다 과학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 박익 묘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무덤은 2005년 2월 5일 사적 제 459호로 지정됐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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