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1960년대, 남해안 외딴 섬에 살 적에 "흰 쌀밥 한 말을 먹으면 육지로 시집을 간다"는 말을 들었다. 한 가마가 열 말이었으니 태어나 과년해질 때까지 먹는 쌀이 10분의 1가마도 못 되었던 모양이다. 형제들은 그나마 명절이나 제삿날 쌀밥을 얻어 먹을 수 있지만 누이들은 그마저도 어려웠을 터이다. 1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후반 경상북도 산골의 절에서 6개월 정도 의탁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한 달 하숙비(?)를 얼마나 내야 할지 주지스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그가 지그시 눈을 감고 했던 말이 "백미(白米) 한 가마"였다.
■ 도시에 살면서 쌀값을 모르고 지냈던 게 사실이었다. 올 4월부터 농촌의 쌀값이 폭락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중요성 때문에 통계청이 열흘 단위로 가격을 파악하고 있다는데, 최근의 것이 80㎏ 한 가마에 13만6,484원이라고 했다. 열흘 전보다 더 떨어진 것은 물론 지난해 이때의 16만1,356원에 비해 15.4%나 헐값에 거래된다고 한다. 언제나 5월에 쌀값이 가장 낮긴 하지만 추곡수매제도가 폐지된 이후 최저가격이었던 2006년 5월 5일의 13만7,276원 기록을 갱신했다. 작년 햅쌀이 나왔던 11월(14만2,292원) 이후 계속 떨어져 왔다.
■ 대학생 도시 하숙비의 반값을 넘었던 '백미 한 가마'가 30년이 지난 지금 대졸사원 초임의 10%도 안 된다는 계산이 정말 낯설다. 2005년 양정개편으로 정부가 일괄적으로 하던 추곡수매 대신 농협과 민간 미곡종합처리장(RPC)이 산지에서 쌀을 사들여 수요ㆍ공급을 조절하고 있다. 계속된 풍년으로 수확량이 많아졌고, 품질이 개량돼 도정비율(벼를 빻아 쌀이 되는 비율)이 워낙 높아졌다고 한다. 주요 소비 변수인 남북관계도 영향이 있어 창고엔 재고량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넘쳐 나는 양이 작년보다 15.3%, 재작년보다 63.4%가 증가했다.
■ 정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 '격리'라는 것인데 농협과 RPC 등에서 쌀을 사들여 시장에 내놓지 않고 별도 창고에 저장해 두는 일이다. 뒤늦게 "20만 톤 격리 예정, 10만 톤 우선 격리"라는 대책을 발표했지만 500만톤 생산량에 비하면 대책이라 여길 수가 없다. 재고량 급증으로 '단경기(端境期) 쌀값이 수확기보다 낮은 역계절진폭'이 이어지고 있다. 한 달 생활비에 버금갔던 '백미 한 가마'가격이 샐러리맨 4~5명의 하루 저녁 회식비용에 불과한데, 정부로서 별다른 대책을 세울 재주가 없다고 한다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