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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15>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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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15>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재일 아나키스트들의 항일투쟁

입력
2010.05.10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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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 초월한 무정부주의자의 사랑 죽음 앞에서도 '천황제'에 온몸 항거

1926년 2월 26일 오전 도쿄 대심원 대법정. 정복 차림의 경찰 150명과 헌병 30명이 법원 안팎을 통제하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한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이 피고석에 앉았다.

사내는 하얀 비단 바탕에 보라색을 띤 상의와 쥐색 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학을 새긴 각대를 두르고 있었다. 여성도 하얀 비단 저고리를 걸치고 머리에는 장식 두 개를 꽂은 단정한 모습이었다. 조선식 의복을 착용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 법정을 향해 무언의 항의 표시를 한 피고인들은 박열(1902~1974)과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ㆍ1903~1926)였다.

이들의 혐의는 형법 제73조와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일제의 형법 제73조는 왕, 왕비, 왕세자, 왕세손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이른바 대역죄(大逆罪)였다. 증거도 없고, 폭발물 테러의 대상과 날짜도 명시하지 못한 허술한 기소였지만 3월25일 결심공판에서 대역죄인 박열 부부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다. 퇴정하는 판사를 향해 박열은 "재판은 비열한 연극이다!"라고 외쳤다. 가네코 후미코는"만세"를 외치며 천황제 국가 일본을 조롱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이념으로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꼽지만 제3의 사상, 아나키즘도 간과할 수 없다.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은 개인적 자아의 해방과 자율성을 주장하며 민중을 착취하는 모든 권력을 부인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우파 민족주의는 물론 당에 권력이 집중된 공산주의 역시 비판과 경원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채호, 이회영, 조봉암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았거나 이를 적극 지지했다.

박열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 경성고보에 입학, 3ㆍ1운동에 참가한 뒤 탄압을 피해 도쿄로 건너가 일본 내에서 차별받는 조선인들의 현실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재일 유학생들,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의기투합해 '흑도회' '불령사' 등의 모임을 꾸린 뒤 천황가에 대한 폭탄 테러를 모의했다.

만물절멸을 주장한 그의 아나키즘이 허무주의로 폄하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열은 법정 진술에서 자신의 이념을 "소극적으로는 나 하나의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지상에 있는 모든 권력의 타도가 궁극의 목적"이라고 진술했는데, 이는 그의 아나키즘이 개인적 희생을 통해 사회를 구원하겠다는 살신성인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는 1923년 9월 구속돼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 1945년 10월 아키타 형무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23년간 복역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에서 단일 사건으로는 최장의 수감 기록이다. 박열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돼 1974년 북한에서 사망했고, 1989년 항일투쟁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무적자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학대를 받고, 조선에서 6년간 생활하며 식민지인들의 아픔을 체험한 뒤 아나키즘에 경도됐다. 그는 박열과 동거하며 조선의 해방과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다 스물셋의 나이에 옥중에서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의 생은 시련의 연속이었으나 그것은 권력과의 대결이라는 그의 신념을 더욱 굳게 했다. 일본인 판사는 재판 과정에서 "왜 일본인인 당신이 조선인 편을 드느냐"며 여러 차례 전향을 강요했지만 그는 "나는 권력 앞에 무릎을 끓고 살아가기보다는 오히려 기꺼이 죽어 끝까지 나 자신의 내면적 욕구를 따를 것이다.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흔적을 찾아 나선 지난달 29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공휴일인 쇼와(昭和)의 날이었다. 히로히토 전 일본 천황의 생일이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체포돼 1923년 9월부터 1926년 4월까지 함께 복역했던 도쿄 신주쿠 도미히사마치의 이치가야(市個谷) 감옥 터. 박열 부부는 이곳에 수감돼있는 동안 천황제의 허구성에 대해 일본 법조계와 치열한 법정 논쟁을 벌였다.

박열은 이 감옥에서 자신의 사상을 함축한 '일본의 권력자에게 줌'을 비롯해 '나의 선언'과 '음모론' 등의 글을 썼다. 가네코도 이곳에서 원고지 3,000매에 달하는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썼으며, 200여 편에 이르는 단가(短歌)를 남기기도 했다. 가네코가 도쿄 북쪽 도치기(栃木) 형무소로 이감되기 한 달 전인 1926년 3월, 두 사람은 이치가야 감옥에서 구청에 결혼신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정식 부부가 됐다.

신주쿠역 동쪽에서 15분가량 '감옥거리'라 불렸던 좁은 골목을 따라 걸으면 이치가야 감옥터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은 구립 아동 놀이터와 작은 공원이 돼있다. 휴일을 맞아 공원을 산책하는 노인 한두 명 외에는 인적이 드문데, 한 구석에 1964년 일본 변호사연합회가 세운 '형사자(刑死者) 위령탑'이 이곳이 감옥터였음을 알려준다.

박열 부부가 투옥됐던 이 감옥에서 1932년 히로히토 천황의 암살을 시도한 이봉창 의사, 1924년 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가 순국했다. 많은 일본인들이 아직도 "일본 고유의 제도인 천황제에 대해 외부에서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하지만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을 여전히 금기시하는 일본의 현실을 떠올리면 이 쓸쓸한 감옥터는 전체주의와 결합된 천황제가 어떤 비극을 낳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게 한다.

박열과 가네코가 동거했고 23명의 한ㆍ일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인 '불령사'가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한 2층 셋집은 신주쿠에서 지하철로 10분 거리인 요요기(代代木)에 있다. 간선도로인 야마노테 거리의 북서쪽 지역으로 박열과 가네코가 머물던 당시에는 도시빈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지금은 중산층의 깨끗한 맨션이 즐비하지만 언덕과 언덕 사이에 위치한 저지대라 볕이 잘 들지 않고 잦은 비로 습기에 차 있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불령사(不逞社)' 표찰을 걸고 벽에는 '반역(反逆)'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었다는 옛집은 사라졌지만, 1923년 9월 1일 대지진이 나자 박열과 후미코가 여진을 피해 노숙했다는 언덕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비극으로 끝난 두 사람의 사연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20세기초의 일본 아나키즘을 연구하고 있는 가메다 히로시(龜田博ㆍ57) 전 도시샤(同志社)대 인문연구원은 "박열이 추구했던 아나키즘은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만큼 세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나 일본의 진보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도쿄=이왕구기자 fab4@hk.co.kr

■ '가네코 후미코 연구모임' 대표 사토 노부코

"조선인 혁명가의 부인으로서뿐 아니라, 인간은 권력 앞에서 억압받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 인물로 그녀를 기억해줬면 좋겠습니다."

사토 노부코(佐藤信子ㆍ80ㆍ사진) '가네코 후미코 연구모임' 대표는 가네코 후미코가 자란 도쿄 서쪽 야마나시현에서 그녀의 삶과 문학을 알리는 데 전념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가네코는 고향인 야마나시현에서도 공개적으로 추모하기 어려웠던 인물.

이 모임은 아직도 '반역자'의 꼬리표가 남아있는 가네코의 생이 현대 일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알리고, 그녀가 남긴 옥중 단가(短歌)와 편지 등 문학을 연구하는 모임이다. 2004년 열린 가네코 후미코 추모 심포지엄을 계기로 발족된 이 모임에는 현재 7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모였을까. "일본이 잘못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정주부, 평화교육을 하려는 교사, 은퇴한 목사 등 20대에서 80대까지 남녀노소를 망라합니다. 전쟁에 반대하고 권력의 억압과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점이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회원들은 두 달에 한 번씩 모여 가네코의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와 재판자료 등을 함께 읽으며, 가네코의 생일(1월25일)과 기일(7월23일)에 즈음해서는 학술대회와 추모행사도 열고 있다.

사토 대표가 가네코를 접한 것은 23년 전. 중학교 국어교사 정년을 앞두고 있던 당시 동료 교사들과 지역 어린이들을 위해 야마나시현 출신 여성 문인 6명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책자를 만든 것이 계기였다. 이 책자의 가네코 편을 집필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됐다고 한다.

"동료들은 다 졸업했는데 나는 아직도 가네코를 졸업하지 못했다"는 사토 대표는 "가네코는 수 차례의 전향 권고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무릎 꿇기보다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강인했고, 동시에 감옥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나 감옥 뜰에 핀 풀 한 포기에서 영감을 받아 시를 쓸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사토 대표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가네코는 자신의 생활경험에 입각해 진실을 추구했으며 식민지인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정도로 다정했던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런 면에서 가네코는 많이 배웠지만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지식인들과 차별된다"며 "일본인이건 한국인이건 가네코의 진면목을 더 잘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쿄=이왕구기자

■ 김명섭 '자유공동체연구회' 연구간사·단국대 강사

'천황을 폭살하려 한 테러리스트', '국경을 초월한 무정부주의자의 로맨스'.

식민지 청년 박열과 일본 민중 가네코 후미코의 투쟁과 사랑은 그야말로 1920년대 조선과 일본 사회를 뜨겁게 달군 핫 이슈였다.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으로 바짝 긴장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 도쿄 한복판에서 추진된 박열의 일왕 폭살 계획은 그 사실만으로도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해 명실상부한 국가신앙으로까지 권위를 차지한 일본의 천황제는 어떠한 비판이나 저항도 허락하지 않는 신성불가침 영역이 되었다.

천황제는 일본 국민 전체를 맹신도로 만들어 전쟁터로 내몰았고,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전체를 장악하려는 제국주의 사상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당당히 천황제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밝힌 투쟁은 그야말로 반전·반제 항일투쟁의 금자탑이라 할 만하다.

'박열 사건'은 1923년 9월 1일 도쿄를 강타한 대지진의 와중에서 일본 지배층이 자행한 조선인 대학살을 모면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단지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6,000여명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6,000여명을 보호검속한 일제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폭동'을 명분으로 박열과 불령사 회원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권력층의 의도는 이들의 당당한 투쟁으로 철저히 어긋났고, 그 대가로 박열은 세계 최장 기간의 기록인 23년 간의 투옥, 가네코 후미코는 의문의 죽음을 당해야 했다.

이후 박열의 항일 유지를 받든 아나키스트들은 보다 조직적이고 강렬하게 투쟁했다. 흑우회와 흑우연맹 등은 항일과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며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과의 연대 활동에 나서 재일 한인들을 규합했다.

3,000여명의 조합원을 가진 조선동흥노동동맹과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은 그 대표적인 항일 노동단체인데, 친일 단체에 대한 투쟁은 물론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에도 크게 기여하며 1937년까지 활동했다.

이외에도 계림장과 신문배달인조합, 자유청년연맹 등 도쿄에서만 9개 조직 3,200여명의 아나키스트들이 활동했고 오사카와 효고, 아이치 현 등에서도 13개 단체 800여명이 조직된 것으로 알려졌다.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1940년말 비밀결사 건달회가 적발될 때까지 합법ㆍ비합법으로 꾸준히,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처럼 일본에서 풍부한 이론 습득과 다양한 활동을 경험한 젊은 아나키스트들 중 일부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원심창, 나월환, 이하유, 박기성, 이현근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상하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을 비롯해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나아가 광복군 제5지대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온몸으로 항거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유지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독립운동과 자유공동체사회 건설에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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