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얘기 하나를 꺼내야겠다. 2월 임시국회 때의 일이다. 1월 말 이명박 대통령 주재의 첫 고용전략회의에서 제시된 고용증대 투자세액 공제제도의 도입 여부가 도마에 올랐다. 중소기업이 고용을 늘릴 경우 법인세에서 1인당 일정액의 세금을 깎아준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지난해 야당이 비슷한 제안을 내놓았을 때 "2004년 도입했다가 실효성이 없고 재정만 축내 2년 만에 폐지한 제도"라며 극구 반대하던 정부가 이 안을 다시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총리·장관 '영혼없는' 말 바꾸기
당연히 비판이 쏟아졌다. 윤 장관은 "고용을 늘리기 위해선 가능한 정책수단을 모두 동원할 필요가 있다"고 옹색하게 맞섰으나 여당의원들마저 정부가 몇 주 만에 입장을 180도 바꾼 내막을 따지자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공무원은 혼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여야 모두의 실소를 자아낸 이 한마디로 논란은 끝났다. 공직사회의 '따거(大兄)'로 불리던 그가 취임 초 "요즘 공무원들에겐 영혼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데 비애를 느낀다"며 소신 있는 정책 추진을 강조했던 기억을 떠올린 사람은 더욱 씁쓸했다.
얼마 전 정운찬 총리는 대한노인회 주최의 한 연찬회에서 희망근로사업 확대를 위한 추경예산 편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3월 임시국회에서 야당이 5조원대의 일자리 추경을 제안하자 재정건전성 훼손을 이유로 거부했던 그 정 총리가 말이다. 주무 부처인 기획재정부는 즉각 부인하고 나섰지만 이미 청와대와의 조율을 끝냈다는 얘기가 전해지자 낭패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다.
눈치를 챘겠지만 두 사람은 이명박 정부의 개국공신이 아니다. 그들의 무기라면 중도보수 성향의 전문성과 개혁성이다. 그런 배경과 한계를 의식해서인지 두 사람은 이른바 포퓰리즘 정책과 싸우는 투사 역을 자임한다. 정 총리가 세종시 구상을'나라를 거덜내는 포퓰리즘의 산물'이자 정치권의 아집이 빚어낸 불량품으로 매도하며 세종시 수정안에 자리를 건 것은 알려진 대로다. '공무원 영혼 파동'을 겪은 윤 장관은 기회 있을 때마다 "값을 치르지 않고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이 많아져 걱정"이라며 세종시 문제, 무상급식 논란, 일률적 정년연장 요구 등을 대표적 포퓰리즘으로 꼽았다.
지방선거철을 맞아 정치권이 계산서는 덮어둔 채 앞다퉈 뭉칫돈이 드는 선심공약을 남발하는 요즘 이런 지적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공짜점심은 없고 현재의 편익은 미래의 비용으로 돌아온다는 경제의 기본원칙에서 봐도 포퓰리즘의 만연은 우려스런 현상이다. 더구나 방만한 나라살림과 분에 넘치는 복지로 재정 파탄에 직면한 그리스 등 남유럽이 세계경제의 뇌관으로 등장함에 따라 재정 건전성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정부가 내년 예산편성지침을 마련하면서 최근 2~3년 동안 악화된 재정 건전성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강조하고, 이 대통령이 엊그제 재정 전략회의에서 저출산ㆍ고령화 시대에 부합하는 발상의 전환을 주문하며 건전재정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달라고 강조한 것은 이런 맥락일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의지가 고무줄 잣대처럼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정권의 관심사항인 4대강 사업은 복지는 물론 고용보다 앞서는 성역이고, 고용이 화두가 되면 실효성이 의심되는 정책도 일단 시행하고 본다. 반면 재원부담을 고려하지 않은 무상급식 확대는 포퓰리즘이다.
재정건전화 수단·목표 분명히
정부가 이러니 눈치 빠른 한나라당은 전철ㆍ버스 등의 교통비 소득공제, 주민세 30% 고향세 전환 등의 선심공약을 무더기로 내놓아 세제를 아예 누더기로 만들고 있다. 비과세ㆍ감면 축소를 외치다 제풀에 나가 떨어지는 정부의 약점을 정확하게 짚었다.
그런데 대통령의 당부가 묘하다. 덜 써서 적자를 줄이는 축소형 재정보다 더 써서 이익을 내는 확장형 재정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란다. 취지는 좋은데, 종종 영혼을 빼놓는 공직사회가 메시지를 잘못 읽을까 봐 걱정된다. 재정 건전화의 첫 걸음은 '내가 하면 로맨스(투자)이고 남이 하면 불륜(낭비)'이라는 모순된 인식을 걷어내는 분별력에 있기 때문이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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