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3인천대회 후 전두환 정권은 나를 포함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주요 간부 대부분을 지명수배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수도원이나 음식점에서 회의를 열어 투쟁계획을 논의하거나 구체적 실천방안을 점검해나갔다.
그런 가운데 나는 민통련의 운동론 정립에 착수했는데, 운동의 정상적 발전을 가로막는 운동권의 교주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운동론을 정립해야겠다는 평소 생각이 5ㆍ3인천대회를 거치면서 더 간절해졌다.
더욱이 청년학생들의 교조주의적 편향은 이론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청년학생들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인 만큼 결국 인간해방의 새 세상을 염원하는 청년학생들의 욕구에 부응할 새로운 인간해방의 운동론이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간 밝혀온 민통련의 운동론에다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서 '민주통일민중운동론'을 정립했는데, 내가 구속되는 바람에 널리 확산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이 운동론의 중요 내용을 간단히 언급해둠으로써 새로운 운동론 정립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아울러 그 당시 통용되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론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밝혀 두고자 한다.
먼저 나는 우리 운동의 목표가 인간해방의 세상 건설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생산수단의 사회화, 계획경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 곧 민중주체민주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리라는 점을 밝혔다.
인간해방을 목표로 한다고 하면 흔히 사회주의인 줄로 생각되고, 그래서 탄압의 빌미가 될 수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해방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은폐할 수는 없었다.
민중주체민주주의가 이념인 한, 국민대중에게 운동의 목표를 밝히는 것이 옳은 데다 인간해방을 목표로 하지 않는 사회변혁운동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또 청년학생들이 인간해방을 염원해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터에 인간해방을 목표로 하지 않는 이념으로는 청년학생들의 사회주의적 편향을 중단시킬 수 없기 때문에도 인간해방의 제시는 불가피했다.
다음으로 민주화의 전략은 민중봉기임을 분명히 밝혔다. 민중봉기에 대해서도 군사독재정권은 민주세력을 불법폭력집단으로 매도하는 근거로 삼겠으나 이것을 피해 보고자 민중봉기가 민주화의 전략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민중을 민주화운동의 주체로 하면서 민중으로 하여금 민주화의 전략을 모르게 해서는 안 될 일이며, 특히 청년학생들의 경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전략인 폭력혁명을 전략으로 삼고 있는 터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민중봉기를 전략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민중봉기라고 하면 폭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1987년 6월 민중항쟁을 통해 전두환 정권으로 하여금 '6ㆍ29항복선언'을 하게 했다. 바로 그 6월 민중항쟁이 전형적인 민중봉기인 바, 이것을 폭동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87년의 6.29항복선언 이전에는 법률과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민중봉기를 민주화의 전략으로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민주화가 상당 정도 이루어져 법률과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민중봉기를 전략으로 채택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나는 이 운동론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를 부인하고 민중주체민주주의를 제시했으며, 또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쁘띠부르주아로 분류하던 진보적 지식인, 대학생, 양심적 자영업자, 그리고 심지어 직업적 운동가 등을 '자주계층'으로 분류해 노동자계급보다 더 진보적임을 밝혔다.
요컨대 사회주의의 이상인 인간해방 세상의 건설은 대체로 수용하되, 그 건설방법으로는 사회주의와 달리 사유재산과 시장경제가 인정되는 가운데 노동의 자아실현 곧 노동해방이 구현되고 국민의 복지가 보장되며 나라 정치의 주체가 노동자가 아니라 국민대중이 되는 민중주체민주주의를 제시했다.
나는 '이념은 현실에서 나오고 전략은 실천에서 나온다'고 보고 이 운동론을 정립했다. 이런 관점이야말로 오히려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부합하리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 진보진영(운동권)의 마르크스주의 인식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위배된다고 본다.
심하게 말하면 우리나라 진보진영이 인식하는 유물론과 변증법은 관념적 유물론과 형이상학적 변증법이어서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난해 마지않는 관념론과 형이상학일 뿐이다.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사상이나 이념 등 이론도 변화한다고 보는 것이 마르크스가 제시한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우리나라 진보진영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엄청나게 변해도 150여년 전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념과 전략을 그대로 따르니 마르크스의 뜻에도 배치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더라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진보이념이 정립되어야 한다.
나는 90년 중반까지는 민중주체민주주의 내지 대중주체민주주의를 주창했으나 90년대 후반부터는 '민주시장주의'를 주창하게 됐다. 군사독재시절에는 민주화를 이루어야 했고 민주화의 전략은 민중봉기일 수밖에 없어 민중주체민주주의를 주창했으나, 90년대에 접어들어 민주화가 상당 정도 이루어져 민중봉기를 전략으로 채택하는 것은 적절치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 정보화와 세계화는 문명의 전환 곧 정보문명시대의 도래를 의미하고 정보문명시대에는 인간의 해방된 삶이 실현될 수 있어 인간해방을 실현할 새로운 이념의 정립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해방을 실현할 새로운 진보이념으로 정립한 것이 민주시장주의이다.
민주시장주의야말로 오늘 전 세계가 직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인간해방의 세상을 건설할 새로운 대안이념이 되리라는 게 내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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