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망향의 계절이다. 사람마다 그리움의 계기는 다르다.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너머'로 시작하는 가곡 에서는 '어여쁜 임'이다. 옛집이나 학교, 뒷산이나 냇가일 수도 있다. 나른한 그리움이 피어 오르는 내 마음의 양지는 증조모와 아버지 산소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자리잡은 두 산소는 유난히 볕이 잘 들어 잔디가 푹신푹신하게 자랐다. 증조모 산소 앞에서는 산밭과 골짜기 집들이 정겹게 다가오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는 강 건너 먼 산들이 겹겹이 밀려온다. 몸은 멀어도 마음은 늘 그 언저리를 맴돈다.
■ 풍수지탄(風樹之嘆)이 아니다. '나무가 조용히 있으려 해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樹欲靜而風不止), 자식이 봉양하려 해도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子欲養而親不待)'는 가르침을 뼈 아프게 새기는 사람은 이미 효자다. 두 분 생전에 효손ㆍ효자가 못 되었듯, 때늦은 후회조차 가슴 깊이 갈무리하지 못했다. 그저 가슴이 답답할 때면 철 없던 어린 시절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던 증조모의 모습과 넉넉했던 아버지 마음이 그립다. 마음 속으로 수시로 두 분 산소로 달려가 여쭙고, 위로를 받는다. 세월이 갈수록 그리움이 더해 문득 눈물을 맺는다.
■ 옛사람들이 자식을 가르칠 때는 효를 으뜸으로 삼았다. '가르칠 교(敎)'자는 '효도 효(孝)'자와 '매질할 복(攵)'자를 합친 것이다.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효심을 갖게 하자는 게 핵심 교육목표였다. 자식을 잃은 고통으로 눈이 멀었다는 '상명지척(喪明之戚)'의 고사가 일깨우는 지독한 내리사랑조차 생물학적 본능에서 비롯한 것과 달리 가까이서 어버이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나 치사랑은 문화와 교육의 힘으로 습득할 수 있는 행동 양식이기 때문이다. 어버이에 대한 효가 군왕에 대한 충(忠)의 기초였으니 더욱 그랬다.
■ 자식을 훌륭한 신하로 만들거나 스스로의 안정된 노후를 기약하는 데 그치는 가르침이 아니었다. 자식들이 사회화 과정에서 겪게 될 불가피한 갈등과 마찰을 줄여 행복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심어주고자 했다. 겸공(謙恭)의 기초로서 효보다 나은 게 없었다. 시대가 바뀌어 효를 가르치는 가정과 학교가 드물어졌다. 그 결과 어버이를 섬기는 자식을 보기 힘들어진 것은 물론이고, 먹고 살기가 넉넉할수록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고 있다. 어버이날에 되새기는 효가 카네이션과 기름진 식사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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