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캠퍼스에 최루탄 냄새가 가실 줄 모르던 30여 년 전 어느 봄날이었다. 따사한 햇살아래 앉아, 바람에 소리 없이 떨어지는 벚꽃들을 보며, 멀리 투쟁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속에서 무심코 흥얼거린 노래. 백설희의 였다.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잎이 슬퍼서일까, 아니면 따사한 햇살에 눈부신 봄조차 느끼지 못하고 가야 하는 청춘이 안타까워서일까. 아직도 확실한 이유를 모른다. 그냥 문뜩 생각났고 부르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지금도 목련과 벚꽃이 떨어지는 봄, 혼자 우두커니 창 밖 풍경을 볼 때면 이유 없이 이 노래를 부른다.
■ 16소절의 짧은 곡. 멜로디는 나직한 소리로 독백하듯 단조롭기까지 하고, 가사라고 해야 딱 두 문장이다. 그러나 만큼 봄날의 화사함과 이별과 상처와 외로움으로 그 화사함이 오히려 애잔하고, 아프고, 허무한 사람의 심정을 한국적 정서인 억제와 체념으로 드러낸 노래도 흔치 않다. 빛깔과 소리와 시각적 상징으로 봄의 풍경을 묘사한 가사의 첫 구절부터 그렇다. 벚꽃과 같은 빛깔의'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고(1절),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는(2절)'봄이다. 그 봄이 알뜰한 맹세가 실없는 기약이 되어버린 여인을 남긴 채 지나간다.
■ 1953년 발표한 손시원 작사, 박시춘 작곡의 는 한국전쟁이 가져온 이별과 그로 인한 여인의 한(恨)을 봄날 풍경과 대비시키며 역설적으로 드러낸 노래이다. 1953년 백설희가 불렀고, 그의 대표곡이 됐다. 사람들은 봄이 소리 없이 갈 때쯤이면 "어 벌써 봄이 가네"라고 말하고는, 습관처럼 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 가수들(이미자 조용필 한영애 등)도 앞다투어 자기 색깔의 를 불렀다. 2005년에는 유명시인 100명이 대중가요 최고의 애창곡으로 뽑았다. 무엇보다 가사의 울림이 크고 깊기 때문이다.
■ 만약 백설희가 아니었다면 는 한 시절의 '유행가'나 '싸구려 한탄'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백설희는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았다. 감정 과잉에도 빠지지도 않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특유의 미성으로 마치 어느 봄날, 옷고름 씹어 물면서 슬픔을 참아내는 한 여인의 모습을 담담하게 노래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가슴을 파고들고, 듣는 사람 각자의 느낌과 상념을 갖게 해준 가수 백설희가 5일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봄날, 젊은이들은 전영록의 어머니, 그룹 티아라의 멤버인 보람이의 할머니로만 그를 기억한다는 것이 슬프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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