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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햇차 한 잔을 앞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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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햇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입력
2010.05.0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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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혓바닥처럼 생겨 작설(雀舌)이라 한다. 그중에서 4월 20일 곡우(穀雨) 이전에 딴 것을 우전(雨前)이라 한다. 그 작은 찻잎을 따서 지리산의 차가 만들어진다. 그 새잎들을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비빈다는, 구증구포(九蒸九曝)를 통해 명차가 만들어진다.

생잎을 따서 모으기도 힘들 것인데 찌고 말려서 만든 우전 녹차는 1g이 수미산의 무게 같다. 그런 무게 100g이 모여야 차 한 통이 되니, 지리산 아래서 차 만드는 일을 '놀이'라고 말하는 벗이 보낸 우전 한 통 앞에 절부터 올린다. 지리산은 녹차의 시배지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 다녀온 사신 김대렴(金大廉)이 차의 씨앗을 가져와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고 한다. 천년이 넘는 역사가 차에 담겨 있어 조심조심 차봉지를 연다. 은은한 차향이 작은 방안 구석구석 스며든다. 차 한 잔을 우려 놓고 나도 차처럼 고요해지고 고고해진다.

차를 즐겨 마신 지 서른 해가 다 되어가지만 나는 아직 쓴맛, 떫은맛, 신맛, 짠맛, 단맛을 다 가졌다는 차의 오미(五味)를 잘 알지 못한다. 젊어 오만했을 때 '선(禪)으로 가는 십만 팔천 리 길이 차 한 잔에 있다'고 큰소리쳤으나 지금은 차를 대하는 일만으로도 행복할 뿐이다. 차향이 퍼져나간다. 차를 담은 잔이 벗의 손처럼 따스해진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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