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생각하면 늘, 마음 한구석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전거를 저어서 나아갈 때 풍경은 흘러와 마음에 스민다.' 김훈의 수필집 의 첫 구절이다. 대체 풍경이 흘러와 마음에 스미는 것은 어떤 일일까? 나이 마흔이 넘도록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몰랐다. 가끔은 어이없는 생각도 들었는데, 내가 자전거를 비롯해 수영 인라인스케이트 등 '균형을 잡아야 하는 운동'을 하나도 배우지 못한 것은, 내 인생이나 감정에 대한 균형 감각도 엉망인 것에 대한 하나의 상징은 아닐까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전거는 내게 금기의 영역에 속했다. 한번은 열 다섯 무렵에 우연히 새 자전거를 경품으로 탄 일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일제 가위와 맞바꾸어 버리셨다. 앞으로 처녀가 될 때, 자전거를 잘못 타면 민망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위는 내 첫 번째 혼수품으로 어머니 장롱에 고이 모셔졌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나는 결혼할 때 그 가위를 가져가지 않았다.
그 후로부터 내게는 '자전거'하면 '가위'라는 거세적 이미지가 따라 붙곤 했다. 이슬람계 아프리카 여자들이 한다는 할례처럼, 자전거는 기이하게도 어떤 '심리적 할례'로 내 마음에 다가왔다. 물론 부모님 몰래 친구에게, 데이트 시절에, 그리고 남편과 아들의 열렬한 응원에 힘입어, 자전거를 배우려 든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자전거는 너무 컸고, 너무 무거웠고, 발이 닿지 않는 순간이 너무 공포스러웠다. 주위 사람들은 내게 '몸치' 혹은 '자전거 저능아' 라는 말을 하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하기 일쑤였다.
세월이 흘러 나도 딸을 낳았다. 막내가 다섯 살이 되자,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다. 보조 바퀴를 단 분홍색 자전거였다. 9살이 된 딸은 올 봄 드디어 보조 바퀴를 떼고 제 아비에게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다. 씽씽 낡은 길을 가르며, 자신의 새 길을 만들어 가는 딸이 참으로 기특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딸이 "엄마도 자전거를 배워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여간해서 고집을 부리지 않는 아이였다. "엄마는 안 돼. 너도 봤잖아. 엄마 자전거 몸치야." 그러나 딸은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배울 수 있으면 엄마도 배울 수 있어." 급기야 딸은 대성통곡을 하며 아침부터 울기 시작했다. "자전거 배워야 돼. 엄마. 자전거 배워야 돼. 엄마…."
아무도 내가 자전거를 못 탄다고 저렇게 슬피 울어준 사람이 이 지구상에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어린 딸에게 '안 되는 것은 안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싫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평생 내 자전거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집에 있는, 남편이 쓰던, 아들이 쓰던 것을 타려고 했었다. 내겐 너무 커 보였지만, '큰 게 더 빨리 간다'고 믿었다. 자전거가 세 대인데, 또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딸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3개월 할부로 큰 맘 먹고 자전거를 샀다. 작고 아담한 내 몸에 맞는 자전거였다. 그리고 한강에 나가, 자전거포 주인이 가르쳐 준 대로, 타고 구르고, 또 타고 또 구르고, 넘어 지고, 하루 종일 헤맸다. 무릎과 손바닥이 다 까지고 멍든 후에야, 문득 깨닫게 되었다. 자전거를 믿어야 한다. 자전거가 나를 타는 게 아니라, 내가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브레이크를 잡으면 멈추고, 몸을 꼿꼿이 세우면 자전거는 더 좋아한다.
엊그제, 15살 이후 30년 만에, 나는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2010년 5월 2일 일요일에 나는 딸이 보는 앞에서 자전거를 탔다. 이제 자전거라는 상징은 가위 대신, 환히 웃고 있는 내 딸의 얼굴과 연결 되리라. 아니 세상 많은 것과 연결되리라.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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