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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대처하는 인간의 생존법… "무뎌지거나 더 즐기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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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대처하는 인간의 생존법… "무뎌지거나 더 즐기거나"

입력
2010.05.05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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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저벅. 한 사나이가 걸어간다. 주변은 온통 뿌연 흙먼지와 적막뿐. 그를 엄호하는 다른 사나이들의 얼굴과 손에 땀이 흐르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시선에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정작 그의 눈빛은 고요하다. 몇 발짝 앞에 놓인 폭탄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제82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6관왕을 차지한 영화 '허트 로커'의 한 장면이다. 게임을 즐기듯 폭탄을 제거하는 윌리엄 제임스 중사(제레미 레너 분)의 모습에선 전쟁에 대한 공포를 읽을 수 없다. 일상을 사는 우리 역시 코앞에 놓인 두려움을 잊을 때가 있다. 뇌가 그렇게 설계됐기 때문이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불이나 뱀을 무서워하는 건 태어나기 전부터 뇌에 내재돼 있는 본능이다. 하지만 전쟁이나 폭탄이 두려운 건 학습된 공포 때문이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전쟁의 참상이나 폭탄의 위력을 경험한 뒤부터 사람들은 전쟁과 폭탄이 무섭다고 느끼게 된다.

공포를 느끼면 뇌 가운데에 있는 편도체란 영역이 바빠진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땀이 나고 동공이 커지도록 명령을 내리는 곳이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다. 편도체가 활동을 시작하면 그만큼 인체는 에너지 소모가 커진다. 공포반응이 계속되면 몸이 지칠 대로 지칠 게다.

그래서 뇌 앞쪽에 있는 전두엽이 나서서 '이제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편도체를 달래는 신호를 보낸다. 이 신호를 받은 편도체는 비로소 공포반응을 억제한다. 일반적인 공포반응은 대부분 이렇게 이뤄진다.

영화 '허트 로커' 속 제임스 중사의 뇌에선 조금 다른 반응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폭탄의 위험에 반복적으로 노출됐다. 그럴 때마다 수 차례 갖은 어려움과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결론만 놓고 보면 폭탄이 있어도 생존에는 지장이 없었던 셈이다. 고비마다 공포반응을 일으키던 편도체가 매번 전두엽에 의해 억제되다 결국 폭탄을 봐도 활동하지 않게 됐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처럼 과거 공포의 대상에 대해 더 이상 공포가 아니라고 새롭게 학습하는 현상을 신경과학에선 '소멸(extinction)'이라고 부른다. 김학진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공포 대상에 큰 사건이나 위험이 뒤따르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면 편도체가 전두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점점 무뎌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서움을 잊어야 하는 까닭

공포가 진화학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라는 건 과학계의 정설이다. 위험 대상을 무서워하고 즉각 반응해야 살아남을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포를 무디게 하는 소멸현상은 왜 생겨났을까. 이 역시 생존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대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과학과 교수는 "소멸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필요 없는 공포가 계속 유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태풍을 겪은 뒤 바람이 좀 강하게만 불어도 공포를 느낀다면 평생 괴로울 것이다. 이런 경우 바람에 대한 공포가 소멸돼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남북으로 분단돼 대치하고 있는 현실 때문에 계속 공포를 느낀다면 한반도에서 정상적인 삶이 어려울지 모른다. 분단 상황에 대한 공포가 어느 정도 무뎌져야 하는 이유다.

한동안 소멸됐던 공포 기억은 다시 위험을 겪으면 자발적으로 회복된다.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는 분단 상황이 오랫동안 큰 위험으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우리 뇌에선 공포 기억이 점점 소멸돼왔다. 그러다 최근 천안함 해군장병 46명의 희생으로 우리는 분단 현실에 대한 공포를 다시금 되새기게 됐다.

공포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

사람들은 공포를 잊기도 하지만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과장하기도 한다. 공포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보거나 괴기스럽게 생긴 인형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다.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독특한 심리를 '잔여긴장'으로 설명한다. 상사에게 야단을 듣거나 친구와 다투는 등 살다 보면 불안해지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 적지 않다. 이를 다 풀지 못하고 마음 속에 쌓아둔 게 바로 잔여긴장이다.

잔여긴장을 해소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일부러 더 큰 긴장(공포)을 만드는 것이다. 이 큰 긴장을 없애버리면 잔여긴장도 함께 사라진다. 공포영화를 본 뒤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기분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포는 잔여긴장뿐 아니라 고통까지 감소시킨다. 무시무시한 장면에서는 옆에서 누가 꼬집어도 아픈 줄을 모른다.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순간 뇌에서 마약 같은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을 내보내기 때문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공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인간은 전에 멸종한 동물들보다 공포에 더 민감한 게 분명하다. 그런데 워낙 겁 많은 인간끼리 모여 살다 보니 상대적으로 좀 덜 조심스러운 인간이 어쩌다 이익을 얻을 수도 있었을 터. 이 과정에서 공포에 대한 대처방법이 사람마다 조금씩 달라지며 진화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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