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회'를 연출한 홍콩의 세계적인 감독 두치펑(杜琪峰)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이창동 감독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단 4편만을 찍고도 나보다 더 수준 높은 영화를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다작으로 유명한 그가 '시'를 본다면 다시 한번 놀라게 될 듯하다. 이 감독의 5번째 영화 '시'는 한국영화사에서 두고두고 복기될 걸작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픈 영화가 있었을까. 이토록 시리도록 눈부신 영화가 또 있었을까. '시'는 어둡고도 밝고,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삶의 모순적 다면성을 완벽하게 보듬는 영화다. 지금 이곳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치부도 은밀히 드러내며 영화의 비판적 기능도 잊지 않는다. "가슴과 머리와 몸이 함께 떨렸다. 인생의 영화를 만났다"(영화평론가 전찬일)는 성찬이 과하지 않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 위를 떠내려가는 여중생의 시신 옆으로 제목 '시'를 떠올리며 영화는 시작한다. 시의 서정이 진창과도 같은 삶을 위무할 수 있다는 걸 영화는 그렇게 암시하며 66세 노인 양미자(윤정희)의 황혼기를 따라간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목욕시켜주고 받은 돈을 생계에 보태야 하는 생활보호대상자지만 미자의 얼굴은 한없이 맑고 밝다. 중학교 3학년 외손자를 홀로 길러야 하는 버거운 삶도 그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늘거리는 긴 치마와 화사한 스카프, 그리고 챙 넓은 모자로 멋을 부린 그는 험한 세파와는 거리가 먼 소녀와도 같다. "꽃도 좋아하고 이상한 소리도 잘한다"며 늘그막에 시인을 꿈꾸는 그는 어느 날 컴컴한 삶의 구렁텅이로 내몰린다. 천진난만하기만 한 외손자 욱(이다윗)이 몹쓸 사건에 휘말리고, 자신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는다. "전화로 오만 소리를 다하는" 딸에게도 차마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할 시련이 인생 말미에 뒤늦게 닥친 것이다.
미자가 찾아간 문화원의 시인 김용탁(김용택)은 시 강좌 첫날 사과를 들고선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미자가 알고 있었던 삶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상징하는 대사다. 미자가 오래도록 먹이고 입히고 씻겨온, "벌써 코밑이 시커매가지고… 하는 짓은 아직도 어린애"라고 생각했던 외손자는 어느 날 악마성을 드러내고, 시 낭독 모임에서 '가운데 다리'를 운운하며 음담패설을 일삼는 남자는 예상과 달리 강직한 경찰관이다. 세상을 순수하게만 바라본 미자에게 시련은 역설적이게도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렌즈 역할을 하게 된다.
외손자는 흉측한 일을 저지르고도 도통 죄책감이 없다. "또 카레야"라며 반찬 투정을 하고, 동네 아이들과 훌라후프 돌리기에 여념이 없다. 공범인 외손자 친구들의 아버지들도 실실 웃으며 자기 자식 걱정에만 몰두하고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 "여자애가 키도 작고, 인물도 뭐 그렇고 하다던데. 애들이 뭘 보고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가요"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는다.
김용탁 시인은 "오래 바라보면서 사과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보고 뒤집어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봐야 진짜 사과를 알 수 있다"고도 말한다. 시를 쓰기 위해선 세상을 제대로 봐야 한다는 것. 미자는 자신의 외손자가 관여된 여중생의 불행을 생각하며 여중생의 행적을 되짚고 시상을 떠올린다. 외손자의 올바른 삶을 위한 눈물 젖은 용단도 내린다.
그리고 미자는 생애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쓴 시를 통해 소녀의 불행을 위로하고 용서와 구원을 갈구한다. 영화는 미자처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는 비판적 화두를 그렇게 던진다. 연탄재처럼 보잘것없던 미자의 순진무구한 속죄의식과 윤리적 행동은 며칠 동안 가슴을 저릿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한 노인의 생이 시가 될 수 있음을, 삶의 고통이 시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영화가 시와 다름이 아닌 것임을 은유하며 끝을 맺는다. 이것이 바로 영화다.
시인 김용택과 황병승, 국회의원 최문순씨가 출연해 눈길을 잡는다.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으로 한국영화 사상 가장 기쁜 소식을 기대해도 좋다. 1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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