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는 양반의 사회경제적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했다. 양반의 가마를 메거나 말을 끌고, 양반의 토지를 경작했다. 때로는 양반의 호위병이 되기도 했고, 양반을 위해 대신 매를 맞기도 했으며, 상전에 의해 사적으로 형벌을 받기도 했다. 물론 노비의 형살(刑殺)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알게 모르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비는 공민(公民)이 아니요 사민(私民)이었다. 따라서 노비는 매매가 가능하고 상속이 가능했다. 학교 교육을 받을 수도 없고 과거시험을 보아 국가의 관리가 될 수도 없었다. 오직 상전인 양반이나 국가기관을 위해 사적으로 봉사해야만 했다. 토지세는 내야 하지만 군대는 가지 않았다. 가장 싸움 잘 하는 남자종이 군대를 가지 않았으니. 누가 나라를 지킬 것인가? 이에 임진왜란 때 유성룡은 노비는 국민이 아니냐면서 이들을 속오군(束伍軍)으로 편성한 적이 있다. 나라가 망하면 노비도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그러면 노비는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고대에는 전쟁포로와 범죄자, 채무자 등 범법자들을 노비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고려가 통일된 후 정복전쟁이 없어져 노비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양반들은 평화시대에도 노비를 계속 양산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노비세전법이었다. 남자종과 여자종 어느 한쪽만 노비면 그 소산(所産)은 노비가 되는 법이다. 일천즉천(一賤則賤)이 그것이다.
본래 남자종은 양인여자와 혼인할 수 없었다. 이것은 강상(綱常)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자종의 상전이 양인남자를 꾀어 그 소산을 자기가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위법이지만 자기의 남자종과 양인여자를 혼인시켜 그 소산까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압량위천(壓良爲賤)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사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고려가 망한 것이다.
이에 새로 건국된 조선왕조에서는 압량위천을 금지하고,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을 실시해 양인아버지의 소산을 일시적으로 양인으로 삼도록 했다. 이 양인 아버지 중에는 상전인 양반상전이 우선적으로 포함되었다. 즉, 양반의 비첩산(婢妾産), 40세가 넘도록 아들이 없는 양인비첩 소산을 양인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다가 노비의 수가 너무 적어지면 또 임시로 노비수모법으로 환원했다. 그리하여 같은 부모의 자식인데도 어떤 자식은 양인이 되고 어떤 자식은 노비가 되는 웃지 못할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양반사회였기 때문에 국가의 공적 영역 보다는 양반의 사적 영역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 이르면 노비인구가 전체인구의 절반이 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이 시기에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해 농업 이외에 할 일이 많이 생겨 노비의 도망이 일반화하게 되었다. 게다가 족보위조(族譜僞造), 공명첩(空名帖), 노비속량(奴婢贖良) 등으로 양반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18세기 이후에는 인구의 80%가 양반이 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모든 국민의 양반화가 진행된 것이다.
이에 따라 노비제도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1801년에 공노비(公奴婢)가 해방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에서 노비제 자체가 혁파된 것이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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