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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터져라 얍!" 황혼 잊은 마술부부/ 황찬길·이정숙씨 무료 공연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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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터져라 얍!" 황혼 잊은 마술부부/ 황찬길·이정숙씨 무료 공연 30년

입력
2010.05.02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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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 100여명이 단 한번의 손짓에 모두 홀렸다. 총기 흐려진 눈동자를 번쩍 뜨고 지켜보건만 놀라움에 반쯤 벌어진 입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아이고 참 신기하네" "재주도 좋네 그려" "새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이 양반아!" 탄성도 모자라 눈앞에 펼쳐진 현상이 도통 믿기지 않는 듯 호통을 치기도 했다.

황찬길(77) 이정숙(57)씨 부부의 마술은 처음부터 좌중을 압도했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등장한 황씨가 불 붙인 막대기를 공중에서 한 바퀴 휙 돌리자 순백의 비둘기 한 쌍이 천장을 향해 높이 솟구쳤다. 29일 오전 서울 송파구 잠실의 한 교회에서 열린 황씨 부부의 마술공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니 눈깜짝할새 비둘기가 오리로, 또 꽃으로 변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마술은 웃음을 싣고

공연 분위기가 무르익자 황씨의 행동이 도를 넘는다. 날계란을 깨뜨린 모자를 관중의 머리에 다짜고짜 뒤집어 씌운 것. 화가 날 법도 한데 정작 피해(?) 당사자는 눈을 한번 찡긋하더니 제 머리를 수 차례 문지르는 것도 모자라 모자 안을 샅샅이 훑는다. 들러붙어 끈적거려야 할 계란은 온데간데 없다. 그 모습에 관중 모두 자지러졌다.

어느새 마술을 보는 이와 하는 이가 한데 어우러졌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 노인들의 얼굴엔 아이 같은 웃음이 번졌다. 그 청량한 웃음은 황씨의 마술이 선사한 작은 선물인 셈이다. 이날 관람객은 이 교회에서 9년째 운영하고 있는 경로대학의 수강생들이다. TV프로그램에 소개된 황씨의 공연을 본 교회 관계자가 연락을 했고, 황씨 부부도 흔쾌히 나섰다.

이날 공연후기는 호평 일색이었다. 권복선(88) 할머니는 "어렸을 때 동네 한 복판에서 가끔 엿장수들이나 요상한 걸 보여주곤 했는데"라며 "정말 오랜만에 배꼽 잡고 쉴새 없이 웃고 나니 10년은 젊어진 것 같다"고 흐뭇해했다. 이규봉(86) 할아버지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손자재롱이나 보면 모를까 늙은 사람이 웃을 일이 뭐가 있어. 신통한 양반 덕에 한없이 웃어보네." 고작 한 시간의 무료공연이 이토록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마술 같은 삶

황씨는 무료 마술공연을 이미 30년 전부터 해오고 있다. 마술협회에서 공인한 마술사 자격증은 있지만 사실 본업이 마술은 아니다. 본인 말에 따르면 오히려 화백 '운곡'(雲谷)으로 더 유명하단다. 실제 미술관도 운영하고 포털 사이트 인물검색에도 등장할 만큼 동양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다.

마술과 동양화, 언뜻 연결고리가 약해 보이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는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황씨는 한국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견디지 못해 당시 '총살'감인 탈영을 했고, 숨어 지냈다. 그러다 1955년 22세의 창창한 나이에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희망이 없던 시절, 그의 홀어머니는 사식(私食) 넣어줄 형편도 안됐지만 떡을 팔아 붓과 화선지 등을 아들에게 넣어줬다. 어머니는 그 황망 중에도 아들이 어릴 적 그린 그림을 팔아 엿을 바꿔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다. 부친은 전쟁 중에 폭격으로 숨졌다. 황씨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19년간 묵묵히 그림을 그렸다. 세월의 힘은 그를 어느덧 화가로 만들어줬다.

그는 75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옥문을 나섰다. 출소 3개월 전엔 합창단원으로 교도소에 위문공연 왔던 지금의 부인을 만나 옥중 결혼식도 올렸다. 새로운 삶이 열렸지만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부인과 함께 교도소 재소자를 위한 위문공연을 다닌 것이다. 당시엔 되는 대로 노래도 하고 만담도 했다.

그리고 1년 뒤 마술의 마력에 빠졌다. "1976년인가 한 번은 교도소 위문공연 중에 마술사 한 명이 초청됐는데, 재소자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에요. 나도 배워야지 싶었죠. 그 길로 일본 미국 등 유명한 마술사를 숱하게 쫓아다녔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무료 마술공연은 교도소를 비롯해 노인정 봉사공연 등 최근까지 수백 회에 이른다.

마술로 맺어진 가족

기술만 익힌다고 마술사 행세를 할 순 없다. 마술공연은 품도, 돈도 많이 든다. 비둘기 한 마리에 50만원이 훌쩍 넘고, 각종 마술도구와 장치를 구입 하는데도 수백만원이 든다. 공연경비만 회당 20만원이 넘는다. 봉사를 위해 전국을 오가는 수고로움은 말할 것도 없다. 황씨는 "한 번 움직일 때 비둘기 여섯 마리와 오리는 기본이고, 탁자와 받침대까지 모두 들고 직접 운전까지 한다"고 했다.

가족들의 도움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웬걸 빠듯한 스케줄과 황씨의 고집스런 재촉에도 묵묵히 짐을 꾸리고 풀고 심지어 마술 도우미 걸을 자처하는 부인 이씨는 말할 것도 없고, 슬하의 3남매 모두 마술사다. 동아인재대학 마墟逵嚮?출강 중인 큰아들 휘(34)씨는 마술소극장(경남 안양시) '휘스매직'을 운영하고 있고, 유치원 교사인 큰 딸 휘정(32)씨도 마술을 어린이교육에 접목시켜 활용하고 있다. 미술을 전공한 막내딸 휘숙(28)씨 역시 현재 서울산업정보학교 마술학과 교사다. 황씨 가족이 더불어 혹은 따로따로 펼치는 봉사활동만 1년에 어림잡아 30회 안팎이다.

황씨는 "마술은 내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단언했다. 봉사가 아니라 자기 공연을 보고 웃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는 행복한 여행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날도 공연사례로 교회에서 준 밥 한끼를 후딱 해치우고 웃음 보따리를 챙겨 오후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강지원 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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