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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30> 허균이 지어 올린 사명당의 시호(諡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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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30> 허균이 지어 올린 사명당의 시호(諡號)

입력
2010.05.02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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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임진란의 승병대장(僧兵隊將)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포로 쇄환(刷還)에 몸바쳤던 사명당 유정(四溟堂惟政ㆍ1544-1610)의 입적(入寂)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임진란의 뒷수습을 위해 조선 조정이 일본으로 갈 사신으로 사명당을 뽑았을 때, "성세(盛世)에 이름난 장수도 많았지만/ 기이한 공(功)은 노스님이 으뜸이었네"라 노래한 젊은 문인 이수광(李晬光)의 송별시가 널리 회자(膾炙)되었다. 이 시는 사명당이 이 전쟁에서 보여준 지도력과 왜국을 상대한 외교 능력을 칭송하고, 스스로 "허리춤에 찬 한 자루 긴 칼/ 오늘날 남아(男兒)된 것 부끄러워라"(《지봉유설》 원한문)고 끝맺고 있다.

그런데 이런 승병대장 사명당이 해인사 홍제암에서 돌아가자, 그와 서산대사의 문하의 동문 후배이며 호남에서 의승병(義僧兵)을 일으켰던 처영(處英)이 그의 문집을 펴내고 비(碑)를 세우면서, 서문과 비문을 모두 교산 허균(蛟山許筠ㆍ1569-1618)에게 쓰게 했다. 허균은 전 해의 귀양에서 풀려나 전라도 부안(扶安)의 농장에 있으면서, 문집의 서문을 쓰고 또 비문을 지었다고 했다.

사명당이라면 임진란 7년 전쟁에 승병(僧兵)을 일으켜 싸웠을 뿐 아니라, 임란 뒤 3,000여 명의 포로 송환과 전쟁 뒤처리까지 "그 기이한 공은 노스님이 으뜸"이었는데도, 스님이기에 비문에 시호(諡號)를 쓸 수 없다는 것이 교산의 마음을 짓눌렀다. 시호는 지체가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존칭인데, 허균은 임금에게 이를 건의할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적(私的)으로 사명당에게 시호를 지어 올리기로 하고, 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설명을 붙여, "말법(末法)을 받들어 구한 것을 자(慈)라 하고, 한 교(敎)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통(通)이라 하며, 은택을 많은 백성에게 끼친 것을 홍(弘)이라 하고, 그 공이 국토를 거듭 회복한 것을 제(濟)라 하니, 이것이 시호를 정한 뜻이라 했다.

허균은 불교와 나라에 아울러 공덕이 많은 큰 스님의 비를 세우면서 시호를 머리에 쓸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는 말로, "참람(僭濫)되게" 개인적으로 시호를 지어 올리는 변(辨)을 삼았다(조영록, 《사명당평전》 한길사 참조). 이 시호를 올리는 글에서는 종교의 구실을 피안(彼岸)에 이르는 길로 한정하지 않고, 사바세계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했던 사명당의 번뇌와 진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한편 시호의 새김은 허균 스스로의 삶의 자세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터이다. 대중을 구제하고 생명의 땅을 회복하고, 모든 종교에 회융(會融)하고자 한 것은 《홍길동전》과 등을 지은 허균의 뜻과도 통한다.

허균이 중형[許篈]을 따라 봉은사(奉恩寺)에서 처음 만난 그 사명당의 인상을 "훤칠한 키에 뜻은 원대했다"고 했는데, 이제 '훤칠한 키에' "진실이 곧 도반(道伴)이라"는 봉은사 현 주지 명진(明進)스님은 사명대사 입적 400년에 맞는 어떤 바깥바람에도 '자통홍제'하시기를.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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