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이 한국에 왔다. 그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도 함께 왔다. 끌로델은 로댕을 비방하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불운의 천재 조각가였다. 10년 전 파리에서 만난 끌로델은 로댕보다 새로웠고 파격적이었다. 로댕의 걸작 가운데는 끌로델의 작품을 보고 다시 빚은 것들이 꽤 있다. 이 대표적이다. 어찌 보면 표절이다. 자아의식이 강했던 끌로델은 로댕이 자신의 작품을 빼앗아가고 조각가로서의 성공을 방해한다고 비난하다가 끝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지금의 학문과 창작 윤리가 적용되었더라면, 로댕은 권력을 이용해 제자의 작품을 가로챘다는 판정을 받았을 것이다.
옛날의 공부란 남이 쓴 것을 필사하는 일이었다. 산업화와 함께 지식이 돈이 되면서 지적소유권 개념과 표절에 대한 경각심이 생겼다. 1980년 대 미국의 유수 대학들이 연구중심 대학을 표방하면서 표절 (plagiarism), 날조 (fabrication), 조작(falsification)의 지적 사기사건들이 등장한다. 과학계에서는 실험 결과를 날조하는 일들이 생겼는데, 대부분 정년보장 심사의 압박에 시달린 조교수들이 범인이었다.
연구 윤리규범을 읽어보면 '남의 것을 훔치면 안된다'는 보편적인 상식이다. 자신의 연구결과를 두 번 이상 사용하는 논문 이중게재도 윤리 위반이다. 승진 심사나 연구비 수혜용으로 한 개의 논문을 두 개로 만들어 업적을 부풀렸다면, 누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양심이 스스로 윤리 위반이라고 말할 것이다. 학생들도 같은 리포트를 표지만 바꿔 두 개 강의에서 학점을 받았다면 학문의 윤리규범을 위반한 것이다. 지금처럼 계량적 평가에만 의존하지 않고 질적으로 연구업적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확립된다면, 이러한 윤리 위반은 줄어들 것이다.
교수 출신 고위 공직자 임명을 앞두고 학문윤리 위반 여부를 검증하기 시작한 지 몇 해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 사회에 학문윤리 문화가 정착되어 있어 균형 잡힌 검증을 하는 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엄마가 대신 숙제를 해 주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런 상태에서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가 자행되고, 교수의 명예를 부당하게 침범하는 것을 과연 정당화할 수 있을까.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는 윤리적 시민의식이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 학문 윤리 위반은 단호하게 대응해야 하지만, 이는 대학이나 기관이 할 일이다. 자정 능력 없이는 세계 어디에도 명함을 내밀 수 없다. 따라서 대학과 학계를 제쳐두고 사회가 대학을 휘젓는 일은 대학 발전에 해가 될 뿐이다.
물론 표절, 도용, 조작 등의 윤리위반은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 적어도 교수의 자존심이라면 "옛날에는 관행이었다"고 변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학이 스스로 비판정신을 잃은 탓에 바깥에서 대학을 우습게 알고 함부로 공격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학자는 학문을 통해 미래를 예견하고 방향을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 대학은 세상의 보험과도 같다. 학문의 윤리규범은 우리 대학들이 진정한 세계적 대학이 되기 위해 꼭 갖춰야 할 조건이다. 이를 위반해서는 안되고, 역으로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해서도 안된다. 또 규칙을 위반하고도 남에게 고발자의 누명을 씌워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은 뻔뻔하고 치졸하다. 내가 꿈꾸는 학문의 세계에서는 정치권에서 하는 흑색선전이 통하지 않는다.
이현숙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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