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는 무엇인가.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양 진영이 전의를 다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 물음은 의의가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는 헛갈리는 개념이다. 두 용어는 정치적인 신조를 말하지만 그 내용은 경제적인 것이 많다. 그런데 그 경제적 내용이 분명치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핵심적 문제인 시장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것이 그렇다.
헛갈리는 경제적 이념 구분
이 문제를 밝히는 데는 구미(歐美)에서 진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경위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8세기 아담 스미스와 같은 초기 자유주의자들이 활동할 때에는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쪽이 진보였다. 그들은 그 이전 중상주의 정책 하에서 국가 권력에 기대어 얻은 특권과 독점을 없애고 경쟁을 도입함으로써 경제성장을 달성함과 동시에 소득 분배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본격적으로 성립하자 그 자체로서 큰 문제를 드러냈다. 자본주의는 유례없는 성장을 가져왔지만 불평등한 소득 분배, 경제 위기,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의 괴리 등의 문제를 드러냈다. 따라서 20세기 들어 자본주의에 수정을 가해야 한다는 생각이 진보의 주된 내용이 되었다.
그러면 보수의 입장은 무엇인가. 보수가 그러한 변화를 부정한다고 볼 수는 없다. 변화는 불가피하더라도 과거와 급격하게 단절하는 것은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보수의 기본적 주장이다.
이런 구도에서 한국은 어디에 서있는가. 한국은 1960∼70년대 국가 주도의 '신중상주의' 정책으로 시작, 그 후 시장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구미 국가들이 몇 백 년 걸렸던 것을 몇 십 년 만에 달성하는 '압축 성장'을 경험하였다. 그 과정에 초기 자유주의자의 과제와 자본주의 성립 후의 문제가 공존해 왔다. 신중상주의 정책은 관치와 재벌 육성으로 특권과 독점을 양산했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 경제 자체의 불평등한 소득 분배, 경제 위기, 노사 갈등, 환경 오염 등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구미 국가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흔히 시장경제를 강조하면 보수이고 정부 개입을 주장하면 진보라고 보지만, 이것은 현 시점에서의 구미의 현실을 한국에 투영한 것일 뿐 역사적 관점을 결여한 것이다. 오히려 과거의 유산인 관치와 재벌 체제를 극복하고 시장경제 원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진보적이다. 자본주의 경제 자체의 소득 분배, 노사 갈등, 환경 문제 등을 전향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도 물론 진보적 주장이다.
그러면 보수의 자리는 어디인가. 지금 관치경제 청산을 반대하는 보수가 있을까.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 민주화의 격랑 속에서 경제정책이 정치논리에 휘둘리지 않게 된 것은 신중상주의 시대에 만든 직업공무원 제도 덕분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재벌의 불투명 경영, 변칙 상속은 어김없이 개혁의 대상이지만, 재벌이 개도국 기업으로서는 유일하게 성공한 글로벌 기업이라는 것은 긍정적 유산이다.
정치 아닌 정책의 문제
소득 분배, 노사 관계, 환경 문제 등에서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데 반대하는 보수파가 있을까. 그러나 20세기에 구미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립한 복지국가는 재정 파탄과 근로의욕 저하 등 큰 문제를 드러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약자의 대변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 노동조합도 꼭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이런 것 모두가 보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선거에서 이기겠다는 정치 논리를 제외한다면, 역사적 경험과 이론적 분석으로 해결할 '정책 문제'인 것이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일반 국민은 이제라도 이런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 절실하다.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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