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 경북 경주시 건천읍 해겸요. 가마 안 불꽃에 원적외선 온도계를 비췄다. 계기판을 지켜보던 도예장 해겸 김해익(56)씨는 두 눈을 의심했다. 2,013도. 2000도를 넘는 가마 온도는 기존 도예 교과서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초고온이다. 청자 연구가들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손사래 치는 온도다. 철의 용융점의 1,530도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며칠 뒤 가마의 불은 꺼졌다. 다시 보름이 흘렀고 가마가 식은 뒤 입구가 열렸다. 가슴을 졸이며 도자기를 꺼내던 김씨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고온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 내린 자기의 뒤쪽에 온전한 모습의 도자기 몇 점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평생 고대해 오던 은은하며 영롱한 비색을 발하고 있었다. 도공 인생 39년, 아니 5대 150년을 매달려 온 고려청자 재현의 순간이었다.
1973년 전남 강진군에서 발견된 통가마를 김씨 집안은 대대로 지켜 왔다. 대부분의 도예가와 연구자들이 흙(태토)이나 유약에 청자 재현의 꿈을 걸었을 때 그는 통가마를 지키며 불에 승부수를 던졌다.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못이 박이도록 들어 온 "불이 다(모든 것)다"는 가르침 때문이다.
가마에 불을 지피면 보통 때는 데 보름, 식히는 데 또 그만한 시간이 걸린다. 필요한 소나무는 20여톤. 하지만 가마 안에는 재가 거의 남지 않는다. 긁어 모아도 한 삽이 안 된다. 재조차 다시 태워 분해시킨 것이다. 최신 폐기물처리기술인 플라즈마 기술이 그의 전통 가마 안에서 실현된 것이다.
그는 전통 터널형 통가마에서 길을 찾았다. 이 가마는 나무를 때면서 보름간 계속 불을 지피는 사이 내부에 쌓인 엄청난 복사열로 어느 시점에 이르면 가마 전체가 불덩이가 되면서 온도가 급상승한다. 그의 가마에서는 장작이 타는 것이 아니라 눈 녹듯 녹아 내린다. 상식을 넘은 전인미답의 불길 속에서 1,000년의 빛 고려청자가 살아났다.
일반적으로 가마 온도가 1,300도를 넘으면 가마 속 기물(器物)이 거의 녹게 된다. 하지만 같은 1,300도라도 도공의 불 때는 기술에 따라 성패가 엇갈린다.
"불 기술은 마치 여인과 같아서 10세면 10세, 20세면 20세에 맞게 불을 먹여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갑자기 먹인 불에는 기물이 터지고 녹아내리지만 차례대로 먹일 만큼 먹이고 달래 가며 주는 불에서는 다치지 않는 물건을 반드시 건져 낼 수 있다. 이렇게 하더라도 앞쪽 70%의 기물은 녹아내린다. 하지만 이들의 불 막이 역할 덕분에 뒤쪽 30%는 기적적으로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불 기술이다.
2,000도 불길을 거친 청자는 진품 특유의 요변(窯變)이 생겨 살짝 일그러지면서 크기가 줄어든다. 또 반짝이지 않고 수수하며 은은하다. 지금까지 청자라고 많이 보아 온, 유리막을 입힌 듯 반짝이는 색감과는 사뭇 다르다. 박물관이나 도록에서 보았던 청자의 비취와 빼어 닮았다.
고려청자는 12세기 인종 때 전성기를 거친 뒤 점차 퇴화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 때 도공들이 대거 왜군에 끌려 가면서 16세기 이후로는 제작 비법 자체가 실종했다. 수많은 도공들이 고려청자 재현에 나섰지만 온전한 고려청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김씨는 청자 조각들을 신주 모시듯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가마에서 기물을 꺼낼 때마다 발색을 비교한다. 이 청자의 색감은 이런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다. 더구나 김씨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이렇다 할 지원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의미가 더욱 크다.
김씨의 선친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그때도 열정을 다해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던 모습에 감동했었다"며 "이번 대단한 성과를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세라믹 연구 권위자 백우현 경상대 명예교수는 "쇠의 용융점을 훨씬 넘은 2,000도에서 탄생한 신비"라며 "도자기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앞으로 밝혀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김씨는 6월에 전국의 유명 도예가와 관련 전문가를 초청해 두 번째 고려청자 재현에 나설 예정이다.
경주=김윤곤기자 msyu@hk.co.kr
은윤수기자 newse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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