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의 삶은 여러 면에서 한 세기 전의 석유왕 존 록펠러를 연상시킨다. 둘 다 독점으로 막대한 부를 일궜고, 이 때문에 정부와 지독히 오랫동안 싸움을 벌여 끝내 회사 분할 판결까지 받았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기에는 열정적인 기부를 통해 '세계 최고의 자선왕'으로 변신한 점 또한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실제로 게이츠는 존 록펠러의 손자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데이비드 록펠러를 여러 번 만난 후, 록펠러 가문의 자선사업 방식을 모델로 재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최대 위기
세계 컴퓨터 운영체제(OS)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던 MS가 뒤늦게 인터넷 시장에 뛰어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1990년대 중반, 이미 웹브라우저 시장은 넷스케이프가 장악하고 있었다. MS는 급하게 94년 말 '익스플로러'를 출시하고 공격적 마케팅을 했지만 시장에서 참패했다.
돌파구는 '끼워팔기'였다. 고전하던 MS는 97년 독점적 OS인 윈도95를 팔면서 익스플로러 4.0을 아예 끼워 넣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웹브라우저 시장까지 완전 장악하게 됐다.
미 법무부가 MS에 대한 반(反)독점 소송을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수년 간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법무부는 익스플로러에 대해 "운영체제 독점을 이용한 끼워팔기"라고 문제 삼았지만 MS 측은 "윈도와 익스플로러는 절대 분리될 수 없는 통합된 제품"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MS 측이 제출한 비디오는 조작흔적이 발견돼 증거로 채택되지 못했고, MS 윈도팀장이 이메일에서 "우리는 윈도의 지위를 더 잘 이용해야 한다"고 적은 것이 드러났다. 판사는 윈도가 설치된 컴퓨터에서 익스플로러를 지워도 컴퓨터가 정상 작동된다는 점을 보여주며 '통합프로그램'이라는 MS의 주장을 무력화했고, 결국 99년11월 재판부는 MS의 독점혐의를 사실로 인정했다.
새로운 출발
새천년이 시작된 2000년은 게이츠의 인생에서 특별한 한 해였다. 그 해 4월 MS는 법원으로부터 기업 분할명령을 받았다. 정부로부터 독점자본가로 낙인 찍히고 기업을 쪼개라는 명령까지 받은
게이츠로선 인생 최대의 좌절일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눈을 돌린 것이 바로 기부였다. 부인 멜린다의 조언으로, 그는 자산 200억달러 규모의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의 주된 관심분야는 AIDS나 말라리아, 풍토병 등 질병 퇴치를 위한 연구와 교육 분야. 하지만 독점사업가가 소송을 벌이는 와중에 천문학적 기부를 한 것을 두고 일각에선 '고도의 홍보작전'이란 비판이 나왔다.
2001년 기업분할 항소심에서 승리한 뒤에서 게이츠는 꾸준히 재단에 기부했다. 그것도 회사자금이 아닌 사재를. 그의 진정성이 받아들여지면서 게이츠의 냉혈적 자본가 이미지는 따뜻한 기업인으로 바뀌어 갔다. 마침내 2005년 시사주간 타임은 U2의 리더 보노와 함께 빌과 부인 멜린다 게이츠를 인류를 위해 인도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 '올해의 인물들'로 선정했다.
새로운 자본주의
빌 게이츠는 애초 아버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선사업이나 기부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삶의 지표를 바꾼 것은 부인 멜린다 덕분이었다고 여러 번 말했다. 2006년 게이츠는 "앞으로 2년 뒤 MS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자선사업가로서 살겠다"고 발표한다. 얼마 안 있어 워런 버핏이 20년 동안 총액 300억달러에 이르는 거금을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버핏은 "멜린다가 없었다면 게이츠 재단에 재산을 기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약속대로 2008년 재단 일에만 몰두하기 시작한 게이츠는 그 해 초 다보스포럼 연설에서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그는 부유한 사람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자본주의가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시장 시스템을 설계하고, 기업들도 이를 염두에 둔 사업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경제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세계적으로 부가 빈민들을 외면하고 이미 부유한 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는 방안을 찾자는 얘기다.
게이츠는 '잔인하고 술수 넘치는 독점자본가'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었다. 지난해 8월 포브스가 억만장자들의 실제 기부 현황을 집계한 바에 따르면 게이츠는 280억달러를 기부해 압도적 1위자리를 지키고 있다. 막대한 기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수성을 의심 받았던 록펠러와 달리, 게이츠는 막대한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아낌 없이 기부하는 '세계 최대 자선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실천가'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다음주에는 빌 게이츠의 아내이자 그의 기부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멜린다 게이츠를 소개합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