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46용사들은 합동영결식 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운구돼 안장됐다. 운구되는 과정과 안장식에서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뜨거운 눈물로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하지만 조국의 하늘은 더 이상 슬퍼하지 말라는 듯 찬란한 햇살을 선사했다.
마지막 여행 떠나는 길
46용사들이 떠나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합동영결식이 엄수된 경기 평택시 해군 2함대사령부에서 안장식이 열린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까지 거리는 100㎞ 남짓. 운구 차량과 마주한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옷 매무새를 갖추고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흔들며 용사들의 배웅했다.
고속도로 IC 주변, 운구 차량이 머문 휴게소들에는 고인의 명복을 빌고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마음을 담은 현수막이 일제히 걸렸다. 고속도로 중간중간에 설치된 교통상황판에도 '천안함 46용사의 명복을 빕니다'는 문구가 표시됐다.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 위 주민들도 운구 차량을 바라보며 애도를 표했다.
운구 행렬이 유성IC로 빠져나오자 대전 시민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46용사들을 맞았다. 화물차와 택시 기사들은 갓길에 차를 붙이는 등 운구 차량이 원활히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이날 안장식은 1979년 대전현충원이 문을 연 이래 최대 규모의 안장식이었다. 46용사 유가족들의 이동을 위해 육·해·공군과 해병대 등에서 버스만 약 90대를 모았다. 또 군 차량은 이동 경로에서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했고 경찰 차량은 운구 차량의 앞뒤에서 에스코트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119구급대도 뒤를 따랐다. 한국도로공사 역시 톨게이트를 개방해 운구 행렬의 이동을 도왔다.
가슴 아팠던 안장식
운구 행렬이 도착한 뒤 오후 3시께 대전현충원 현충문 앞에는 46용사들의 유해가 담긴 봉안함과 영정, 화랑무공훈장이 국화와 함께 가지런히 놓였다. 유가족 2,000여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김성찬 해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열린 안장식은 고인에 대한 묵념으로 막을 열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종교 의식에 이어 고인 1인당 유가족 5명씩 나와 헌화와 분향을 했다. 46명의 이름이 계급 순서대로 대전현충원의 하늘에 울려 퍼졌고, 유가족들은 사진과 봉안함를 어루만지며 또 한 번 오열했다. 영결식에서도 천진난만했던 고인의 자녀들은 정말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이내 눈물을 터뜨렸다. 고 강현구 하사 유가족은 "잘 가고 이제는 따뜻한 곳에 있어야 돼"라며 흐느꼈고, 고 정태준 일병 가족들은 "아이고 태준아"라며 정 일병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내빈들의 헌화와 분향, 9발의 조총 발사에 이어 해군 동료들이 46용사들의 영현을 사병3묘역(308묘판)으로 봉송했다. 일부 가족들은 봉송로로 뛰쳐나가며 "가면 안돼, 가지마"라고 울부짖었다.
천안함 침몰 뒤 이날 안장식까지 34일간 울고 또 울었던 유가족들은 하관을 앞두고 다시 한 번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고 안경환 상사 어머니는 하관 전 아들의 유해를 끌어안고 "내 아들아 왜 이렇게 됐어. 엄마가 한 번 안아 보자 아들아"라고 통곡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46용사들은 하관 허토(봉분에 앞서 흙 한 줌을 관이나 봉안함 위에 뿌리는 것) 봉분 등을 거쳐 모두 조국의 땅에 묻혔다. 대부분의 유가족들은 "이제는 편히 쉬어"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지만 안장이 끝난 뒤에도 쉽사리 묘역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안장식장에도 시민 수천 명이 용사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찾아와 현충문 앞 잔디광장까지 애도의 물결이 넘쳤다. 친구와 함께 현충원을 찾은 윤정선(48·주부)씨는 "곧 군대에 갈 아들을 둔 엄마로서 남의 일 같지 않아 안장식에 왔다"며 "모두 우리의 아들인데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중식(72)씨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마치 내 아들, 내 손자들이 떠나는 것처럼 슬프다"고 애석해 했다.
한동훈 기자
대전=김창훈 기자 ch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