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봄'이라고들 한다. 끝날 줄 모르는 추위로 가뜩이나 짧은 봄이 더욱 짧아졌다. 추위에 밀려 제 때를 놓친 꽃들이 한데 뒤엉켜 한꺼번에 피어났다. 짧아서 더욱 눈부신 계절, 봄을 피워냈다.
길가의 나무들엔 푸름이 돋아나고 있다. 꽃보다 고운 신록이다. 환하게 번지고 있는 초록들. 이제 막 피어난 새순들의 신록 잔치에 눈이 부시다. 벚꽃보다, 과수원의 배꽃 보다 눈을 먼저 사로잡는 건 그 반가운 아기초록이다.
아리수길 5코스. 그 시작은 정선군 여량의 아우라지역이다. 열차역 보다 큰 어름치 모양의 카페가 역 옆에 자리하고 있다. 이젠 열차대신 레일바이크가 더 많이 달리는 곳이다. 열차는 하루 2번만 도착한다. 예전엔 구절리까지 달리던 열차다. 지금은 아우라지역이 마지막이다. 아우라지에서 구절리까지는 대신 레일바이크가 달린다.
마산재 민박 앞에서 마을길로 접어든다. 마을 고샅엔 갖가지 꽃들이 피어났다. 핑크빛 배어난 하얀 꽃들은 벚꽃일테고, 노랗게 피어난 것은 생강나무다. 듬성듬성 진달래꽃도 붉은 물감을 흩뿌려놓았다.
마을길을 따라 한걸음씩 높이를 올린다. 걸음걸음 시선은 높아지며 여량의 넓은 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송천과 골지천이 만난 아우라지의 풍경. 물은 제법 넓어졌고 또 당당해졌다. 고갯마루에 큰 송신탑이 섰다. 이동통신 기지국이다.
이제부터 길은 평탄하게 이어진다. 차 한대 겨우 지날 좁고 구불구불한 이 길이 옛 42번 국도란다. 70년대 여량에서 구절리로 연결되는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여량 주민들이 정선으로 장을 보러 드나들던 길이다. 주민들은 이 길을 '꽃벼루' 혹은 '꽃베루'길이라 부른다.
정선 아리랑에 '아질아질 꽃베루/ 지루하다 성마령/ 지옥 같은 이 정선을/ 누굴 따라 여기 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게'란 구절이 있다. 정선 고을에 들어와 선정을 베풀었던 오 현감이 있었는데 그 부인이 남편의 부임길 따라가다 꽃베루와 성마령을 넘으며 지루함을 달래느라 불렀다는 노래 속 꽃베루가 바로 이 길이다. 벼루 혹은 베루는 벼랑을 뜻하는 지역 방언이다.
꽃벼루 고갯길은 이름만큼이나 길도 예쁘다. 발 아래 강을 달고 걷는 길이다. 길은 강이 흐르는 데로 따라 이어진다. 강물이 오른쪽으로 휘면 길도 오른쪽으로 돌고, 물이 왼쪽으로 굽어지면 길도 왼쪽으로 휘돈다. 물길 건너편으론 물길과 비슷한 높이로 철길과, 꽃벼루길이 바통을 넘겨준 새 42번 국도가 내달린다. 그 길은 땅길이고 이 길은 하늘길이다. 패러글라이딩이나 열기구에 올라탄 듯 둥실 뜬 느낌으로 하늘길을 걷는다.
아리수길 4코스까지의 길들이 강과 붙어 강의 냄새를 맡으며 걸어온 길이었다면 이 꽃벼루길 구간은 강물과 저만치 떨어져 강물을 관조하는 걸음이다. 임을 그리워하는 눈빛으로 강을 굽어본다.
북평면 경계를 지나고부터 길은 산쪽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강물과 잠깐 이별을 해야 한다. 숲은 소나무로 가득하다. 지나는 차도 없고 사람도 없다. 소음으로부터 완전이 차단된 숲길. 그저 봄이 익어가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
천천히 걷는데 녹색의 생명체 하나가 갑자기 펄쩍 튀어 올랐다. 청개구리였다. 펄쩍펄쩍 튀어 오르는 봄을 만난 듯 반가웠다.
다시 강물이 보이고 나전 북평 마을이 발 아래다. 강 옆의 들이 꽤나 넓다. 남평리 마을로 내려섰다. 계속 산길을 이어가면 봉화치를 넘는다고 이정표에 적혀있다. 마을을 지나 나전중학교까지 내려오면 한강의 물길과 만난다. 다시 강과 만난 시간. 북평교를 건너 나전역에 이르면 5코스가 완성된다.
나전 마을 언덕에 덩그러니 올라앉은 나전역도 예쁘다. 동화책에서 막 빠져 나온 듯한 간이역이다. 2004년 미대생들이 그려놓은 도깨비 그림들이 앙증맞다. 그 때 칠한 페인트칠은 막 벗겨지려 한다. 되레 그 퇴색이 파스텔톤으로 건물을 운치 있게 한다. 깃발 없는 게양대에 깃대만 빨갛게 녹슬어가고 있는 간이역. 오랜만에 만난 완전 재래식의 열차역 화장실까지 반갑다. 봄의 서정에 한 참을 머물게 하는 산골도깨비역이다.
■ 여행수첩
강원 정선군 여량까지는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제천IC에서 나와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 문곡에서 59번 국도로 갈아타고 정선을 지나 도착하는 길이 있고,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계속 가다 진부IC에서 나와 59번 국도를 타고 나전까지 내려오는 길이 있다.
아리수길 걷기 5코스는 정선군 여량면 아우라지역에서 시작해 마산재를 거쳐 꽃벼루길을 따라 걷다 북평면 나전역까지 이어진다. 길이는 약 12km. 천천히 걸어서 4시간 가량 걸린다.
여량의 옥산장은 유명한 여관이자 음식점이다. 유홍준 전문화재청장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에 옥산?주인인 전옥매 할머니의 사연이 소개돼 유명세를 탄 곳이다. 시간을 잘 맞추면 할머니의 정선아리랑 가락을 들을 수 있다. 식당 옆에는 할머니가 부지런히 수집한 수석들로 채워진 전시장이 있다. 정선의 토속음식재료로 만든 감자옹심이 백숙 시골된장백반 등 다양한 메뉴를 갖추고 있다. 주말 점심의 피크시간에는 단체손님이 많으니 피하는 게 좋다. (033)562-0739, 0547 나의문화유산>
아우라지역 앞의 청원식당은 콧등치기 국수로 유명하다. 메밀국수의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1인분 5,000원. (033)562-4262
승우여행사는 5월 8, 9일 출발하는 아리수길 걷기(5코스) 참가자를 모집한다. 오전 7시 서울 광화문을 출발해 당일로 다녀오는 일정이다. 참가비는 4만5,000원. (02)720-8311
이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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