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11월 서울중앙지법은 임산부를 포함해 여성 10명을 성폭행한 민모(35)씨에게 10월부터 시행된 개정 형법에 따라 가중처벌 요인을 고려해 유기징역 최고 형량인 징역 50년을 선고했다. 민씨는 형기의 90%인 45년을 복역한 2055년 팔순의 나이에야 가석방 심사 대상이 돼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
# 2010년 9월 서울중앙지법은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시신까지 유기한 김모(33)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씨는 10월부터 바뀌는 형법에 따라 20년간 복역하면 가석방 대상이 돼 2030년이면 교도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민씨와 김씨는 물론 가상의 범죄자다. 그러나 이처럼 개정 형법이 그대로 시행되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중범죄자가 유기징역 상한을 선고받은 범죄자보다 먼저 출감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형 집행에서 형평성 논란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형평성 문제는 무엇보다 법원의 들쭉날쭉한 양형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개정 형법에 따른 새로운 양형기준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사한 범죄에 대해 재판부마다 제 각각의 형량을 선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률 전문가들은 국회가 다양한 의견수렴 과정 없이 여론의 변화에 따라 졸속으로 형법 개정안을 처리한 결과라고 비판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한명숙 사건'을 두고 오랜 시간 공방을 벌였다. 그러다가 위원장은 갑자기 공청회도 생략한 채 "형법 개정안을 의결한다"고 의사진행을 강행했고, 반대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같은 날 본회의에서 이 개정안은 재석 203명 중 찬성 143표, 반대 36표로 원안대로 가결됐다. 이후 개정 형법은 이달 15일 국무회의를 거쳐 공포됐으며, 10월 16일 시행을 앞두고 있다.
법원은 개정 형법에 대해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해칠 수 있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무엇보다 양형기준 적용의 혼란이 걱정이다. 지난해 7월부터 시행 중인 양형기준은 개정 전 형법을 토대로 선고된 판례 등을 분석해 뇌물, 성범죄 등 주요 범죄 7개 유형에 대한 기준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개정 형법 시행 후에는 형량의 상한이 올라간 만큼 이를 적용해 판결해야 하는데, 당장 마땅한 기준이 없다. 그렇다고 기존의 양형기준을 고수하는 것은 법 개정 취지를 무시하는 것이어서 그럴 수도 없다.
단적인 예를 들면, 기존 양형기준의 영향을 받는 횡령ㆍ배임죄와, 이번에 양형이 높아지면서 법관의 재량이 더 많이 작용할 수 있는 사기죄의 경우 비슷한 범죄라도 형량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현 양형기준에 따르면 회삿돈 300억원을 횡령한 A씨는 가중처벌될 경우 징역 7~11년형을 선고 받게 되는 반면, 사기로 300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B씨는 상한이 높아진 개정 형법에 따라 A씨보다 훨씬 더 오래 징역을 살 수 있다.
혼란을 줄이려면 10월 전에 양형기준을 개정 형법에 맞게 대폭 수정해야 한다. 하지만 양형기준이 수정되는 데는 최소 2년이 걸릴 것이란 예상이다. 앞서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현행 양형기준을 마련하는데 무려 50억원의 예산을 썼다. 양형위 전문위원을 지낸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당시 축적된 판례가 있는 상태에서 양형기준을 마련하는 데도 2년이 걸렸다"면서 "개정된 형법의 경우 판례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훨씬 더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개정 형법 시행 전 양형기준 조정안이 나오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셈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1심 양형의 편차는 상급심에서 정리되겠지만, 그때까지 양형 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했다.
강아름 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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