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직 기양금속 대표
■ "화공약 독가스보다 독하게 공부했죠"
"돈도 없고 빽도 없었지만 내가 가진 기술만큼은 최고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20대 중반에 무작정 '사장'이 됐다. 무일푼으로 상경한 뒤 도금공장에서 몇 년을 일했지만 큰 돈을 만지진 못했다. 대신 본인 없이는 회사가 굴러가지 못할 만큼 기술력 하나는 인정받았단다. 마침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자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기양금속공업㈜ 배명직 대표. 그의 명함엔 '도금산업의 미래를 개척하는'이라는 수식문구가 선명하다. 도금산업이 3D업종이니 공해 유발산업이니 해서 냉대받는 현실에서도 그는 26년간 외길을 걸어왔다. 이제 50대 초반이지만 종업원 50여명이 연 6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소기업의 '사장님'이 됐고, 국내 유일의 표면처리(도금)분야 명장 반열에까지 올랐다.
경기 안산시 성곡동 반월공단 내에 위치한 기양금속 사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사장실이라고 해봐야 공장 2층 한 켠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에 불과했다. "주변에서 좀 꾸미라고 하는데 예전부터 직원들과 부대끼며 지내온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곳이 마냥 편하다"고 했다. 겉보기엔 귀공자 스타일인데 꽤나 소탈한 듯했다.
그는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학창 시절에 원 없이 싸우고 놀아봤기에 사회에서 일도 그만큼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정색을 하고는 "자격증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했다. 경북 영주공고 화공과 재학시절 취득한 '화학분석기능사 2급 자격증' 얘기였다.
사실 그를 도금의 세계로 이끈 건 이 자격증이었다. 고교 시절 하도 사고를 많이 치다 보니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자'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반 친구 80명 중 합격자가 9명뿐이었다"며 "아마 공부에도 소질이 있었나 보다"고 농을 건넨다. 하지만 어렵게 고교를 마친 후에도 맘을 잡지 못했다. 2년간 대구에서 낚싯대ㆍ안경테ㆍ못 등을 만드는 공장을 전전했다. '욱' 하는 성격 탓에 어디서도 두 달을 버티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살아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 길로 곧장 서울행 야간열차를 탔다. "달랑 기능사 2급 자격증 뿐이었지만 그래도 이게 있으면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무급으로 시작한 도금업체 생활은 그야말로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폐수처리장 관리를 맡았는데 돈이 없어 따로 숙소를 구하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온갖 독성 화학물질이 넘치는 그 곳에서 라면박스 몇 장을 깔고서 숙식을 해결하다 보니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아침에 일어나다 쓰러질 정도였다. 배 대표는 "라면국물만 먹어도 감사한 시기였다"고 했다.
이듬해 월급이 나오자 그는 곧바로 공장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는 밤낮 없이 도금기술과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남 밑에서 일하는 성격이 못되니 사장을 해야 할 것 같고, 그런데 가진 게 없으니 최고 기술자가 되어야 했다." 배 대표는 입사 3년만에 품질ㆍ공정관리 책임자인 기술부 계장 자리에 올랐다. "난생 처음 명함을 받았는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눈물을 흘리곤 했다."
배 대표는 24살 때 인생 최대의 모험을 했다.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자 동료들을 모아 아예 자신의 회사를 차린 것. 가까운 곳에는 직접 수레를 끌고 배달할 정도로 비용을 줄이면서 그 돈으로 온갖 화공약품을 구입해 도금기술을 연마했다. 그 결과 화학분석기능사(1997년)에 이어 특수도금기능사(2000년)와 전기도금기능사(2001년) 자격증을 땄고, 마침내 도금분야 최고 자격증인 기능장(2001년)까지 취득했다.
학업도 병행했다. 1998년 재능대학 표면처리과를 졸업한 뒤 산업기술대학교 및 대학원에서 신소재공학을 공부해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비슷한 시기 자신의 경험과 이론을 접목시켜 2권으로 구성된 '도금표면공학'이란 책도 펴냈다. 지금껏 도금설계ㆍ개발 및 품질관리 분야의 지침서로 통하는 책이다. 그는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보자는 생각에 정말 독가스보다도 더 독하게 공부하고 연구했다"며 웃었다. 지금은 산업기술대와 경기공업대에서 겸임교수를 맡아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실무에 정통하고 이론으로 무장하니 기술개발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지금은 일반화한 '크롬 프리 도금법'은 인체에 해로운 크롬을 사용하지 않는 세계 최초의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도금산업이 환경친화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아연ㆍ니켈ㆍ주석 등 2가지 이상의 금속을 합성한 도금기법, 초음파를 이용한 은도금 등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신기술로 인정받고 있다. 도금 관련 특허만 6개다.
기양금속은 2004년 영세업체가 대부분인 도금업계에선 드물게 실험실과 연구퓽?갖춰진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공장 2층의 사장실은 허름해도 바로 뒷편에는 꽤 그럴싸한 간이실험실이 꾸며져 있다. "끊임없는 기술 개발이야 말로 기능인의 최우선 가치"라는 그의 신념이 단적으로 묻어난다.
배 대표는 "도금은 숟가락에서부터 컴퓨터 제조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필요한 첨단 기초핵심산업인데 3D업종으로 천대받고 있어 안타깝다"면서 "도금산업의 첨단화를 위해 도금교육과 연구를 할 수 있는 표면처리종합지원센터를 건립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도금분야를 첨단 신소재분야로 키워내겠다는 야심찬 포부다.
■ '국가대표' 명장들이 뭉쳤다
대한민국 최고의 장인으로 꼽힌 각 분야 명장들이 세계 무대로 도약한다. '골드 스퀘어'(www.goldsquare.co.kr)라는 공동 브랜드를 통해서다. 상업성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명장들의 꿈은 다부지다.
"인천국제공항에 가면 '정관장' 정도 빼고 나면 우리 것이라고 부를 게 없다"는 인식이 출발이었다. 각 분야 명장들이 만든 작품들을 공동 브랜드화해서 우리나라의 대표 상품으로 키워내자는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이들 작품이 세인의 뇌리에서 금방 잊혀지는, 그래서 우리의 전통과 기술이 사장되는 현실을 타개하자는 뜻도 포함돼 있다.
50대 초반이라 명장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배명직 기양금속 대표가 앞장섰다. "작품성만큼은 이미 한국 최고임을 인정받았으니 효율적인 마케팅이 결합된다면 충분히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자비를 털어 기획ㆍ마케팅을 담당할 ㈜UNG라는 별도 법인도 세웠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일생을 작품활동에만 매진해온 장인들이라 상업화에 대한 거부감이 꽤 있었던 것. 하지만 "단순히 돈을 벌자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기술만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든든히 받쳐줄 거라고, 미래세대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자고, 그 길에 함께 나서자고 호소했다.
2년여만의 준비 끝에 작은 결실을 맺게 됐다. 오는 30일 안산에 위치한 산업기술대학교 1층 로비에서 '명장의 전당'이란 테마로 전시장을 개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배 대표와 함께 천한봉(도자기), 김찬(귀금속), 김태자(자수), 김규장(나전칠기), 주용부(칼) 등 내로라하는 명장 32명이 우선 참가한다.
전시장 개관과 함께 가능한 시ㆍ군ㆍ구에 명장 상품 판매장도 설립할 계획이다. 명장들은 생산에만 전념하되 마케팅은 '골드 스퀘어'라는 공동 브랜드로 진행된다. 수익의 일부는 "기능인의 꿈을 키우고 있는 실업계 고교생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기부할 생각"이다.
배 대표는 이 같은 노력이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고가 소장품을 명장들의 혼이 담긴 작품으로 대체하는 것은 물론 수출상품화를 통해 생산적 한류문화를 창출할 수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는 "제때 결재 좀 해달라"는 직원들의 아우성을 뒤로 한 채 경남에서 올라온 한 명장과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면서도 기자에겐 "기업체계를 기술 중심으로 바꾸고 자립형 중소기업도 늘리고 고용도 창출하고, 그러면 국가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하는 것 아니냐"는 소신을 거듭 밝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산=양정대 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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