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첫 날부터 한국일보 오피니언 면의 '길 위의 이야기' 연재를 맡은 정일근(52) 시인은 서울 아침 기온이 영하 3도 아래로 떨어졌던 1월 18일자에 미나리 심는 무논, 미나리꽝에 대해 썼다. 꽝꽝 언 미나리꽝의 얼음을 깨면서 미나리를 가꾸는 농부들과, 그런 정성에 화답하며 푸르고 향기롭게 자라나는 미나리를 예찬하며 그는 이렇게 적었다. "세상은 그것을 '맛'이라 부르지만 나는 '희망'이라 부른다. 겨울 미나리는 푸른 희망이다. 얼음이 얼어도 얼지 않는 뜨거운 희망이다."
'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는 그런 미나리꽝 같은 글이다. 각박하기만 한 세태에 숨통을 틔워주며 미나리꽝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가 29일자로 100회를 맞는다. 울산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서울에서 410㎞, 울산 도심에서도 25㎞ 떨어진 이 호젓한 농촌마을에서 그는 한국일보 독자들을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600자 메시지를 발송하고 있다. 서정과 서사가 어우러진 그의 글에선 언제나 미나리 냄새를 닮은 문향(文香)이 물씬하다.
지난 24일 오후 울산 고래생태체험관에서 만난 그는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뭐 타고 왔능교?"라고 운을 떼는 그의 느릿하고 간결한, 사투리 섞인 말투는 그의 글을 쏙 빼닮았다. 연재 시작할 때보다 몸매가 좀 날씬해졌지 싶었는데, 역시나 "연초 79㎏이었던 체중이 73.5㎏으로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건강해 보였다. 그는 재작년 여름 공정무역을 지지하는 뜻에서 동티모르에 커피 농사를 도우러 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몸이 부어 있었다. "잠자리에서 주제를 구상하고 새벽에 두 시간 동안 원고를 쓰는 규칙적 생활을 하니까 부기가 많이 빠졌다"는 그는 "'길 위의 이야기' 쓰는 일이 고되고도 즐겁다"고 했다.
정씨가 회장을 맡고 있는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은 이날 고래생태체험관에 사는 돌고래 3마리에게 시를 낭송해주는 특별한 행사를 가졌다. 고래에 쏟는 정씨의 관심과 애정은 유명하다. 포경 반대 운동을 해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고, 몇 해 전엔 국내 유명 시인들의 '고래시'를 모아 영역 시집을 내기도 했다. 그의 각별한 고래 사랑은 '길 위의 이야기'에서도 자주 확인된다. "미역이 요오드 함유량이 많아 산후 조리에 좋은 식품인 것을 제일 먼저 안 것은 고래였다"(2월 17일자), "돌고래는 칭찬에 춤추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고 아프면 눈물을 흘릴 줄 안다"(3월 17일자) 등등.
이튿날인 25일 오전 정씨는 시 낭송회에 참가했던 시인들과 함께 고래조사선을 타고 장생포 앞바다로 나갔다. 그는 2007년 울산시가 고래 개체 수 파악을 위해 고래조사선을 정기 운영할 때부터 목시(目視) 조사원으로 함께했다. 조사선을 탄 게 수십 번은 넘을 텐데도, 그는 내내 바다를 누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에 살면 사방을 둘러싼 육지에 갇히게 되지만, 바다에서 살면 가도 가도 끝없는 드넓은 공간이 삶의 터전이 된다." 그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철들면 시인이 아니다'라는 문단의 금언을 떠올린 순간 정씨는 덧붙였다. "사실 '길 위의 이야기' 쓰면서 서울 사람들 약 올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요."
이날 탐사에서 아쉽게도 고래는 발견하지 못했다. 고래의 군무를 목격하기엔 아직 수온이 충분히 높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탐사선에 타면 고래 발견 확률이 높다"(1월 6일자)며 '럭키맨'을 자처했던 정씨는 조금 머쓱해했다. 하지만 그는 일행에게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아구탕 점심을 대접하며 단숨에 자존심을 회복했다. '길 위의 이야기'에서 틈만 나면 바다메기, 여수 금풍생이, 가덕 대구, 붕장어회, 봄 쭈꾸미, 깅이죽 등등을 언급해 독자들이 침을 삼키게 만들었던 그의 소박한 미식 취미가 다시금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문득 조선 후기의 저작 '우해이어보'에서 게 껍질로 지붕을 만들어 바닷가에 세운 간이주점, 잡(卡)을 찾아내 소개했던 2월 3일자 정씨의 '길 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수필가가 정씨의 허락을 받아 자기 책에 인용하기도 했던 글이다. "어느 누군들 이 낭만적인 술집을 피해갈 수 있겠는가. 잡 한 채 고향바다에 지어놓고 바다를 안주 삼아 크게 취해보고 싶은 날이다." 그의 글이 바로 잡이다.
울산= 글·사진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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