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발자국 옮기고 멈춰 한참 숨을 몰아 쉬고, 다시 세발자국 옮기고 멈춰 서선 또 숨을 몰아 쉬고. 그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해발 8,000m 너머의 가파른 벼랑을 한 발자국씩 올랐다. 오은선 대장은 그렇게 14좌의 종지부, 안나푸르나(8,091m) 정상에 마침내 섰다.
오 대장은 26일 캠프2(5,600m)에서 캠프4(7,200m)까지 11시간에 걸친 산행을 한 후 잠시 텐트에서 휴식을 취하고는 곧바로 새벽 1시45분(현지시간) 텐트를 출발해 정상공략에 나섰다. 오전 한때 대원들 위로 눈보라가 덮치는 아찔한 순간도 보내야 했다. 13시간을 넘는 산행 끝에 마침내 정상에 올라선 그는 태극기를 꽂고 카메라를 향해 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국민들에게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안나푸르나는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론 처음으로 1950년 프랑스 모리스 에르조그 팀을 통해 인류에게 정상을 내준 설산이다. 하지만 한국의 여성 산악인들에게 안나푸르나는 비원(悲怨)의 땅이다. 1993년 한국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지현옥이 99년 안나푸르나에 도전, 정상을 밟았으나 하산길에 실족해 생환하지 못했다. 안나푸르나는 지난 60년간 가장 많은 등반가들의 목숨을 앗아간 곳으로도 악명 높다. 히말라야 16좌를 등정한 엄홍길 대장조차 안나푸르나를 오르기까지 4번을 실패했고 눈 앞에서 동료도 잃었다.
오 대장의 안나푸르나 도전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09년 가을 14좌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이곳을 찾았으나 악천후에 결국 철수하고 말았다. 당시 오 대장은 베이스캠프의 라마제단 앞에서 "살아 내려올 수 있게 해줘 고맙다. 내년 봄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었다.
오 대장이 히말라야 8,000m 급에 처음 성공한 건 1997년 7월의 가셔브롬II(8,035m) 봉우리다. 그는 2007년 7월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K2(8,611m)를 등정한 이후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생애의 목표로 삼게 됐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겔린데 칼텐부르너는 10개 봉을 올라 있었고,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도 9개 봉을 올라 저만큼 앞서 가던 상황이었다. 오 대장은 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연속 등반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했다. 등정이 끝나도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서 몸을 추스린 뒤 곧바로 다음 등정에 나서는 방식이다. 2009년 5월 칸첸중가(8,586m)를 오르고 보름 뒤 다시 다울라기리(8,167m)를 등정했다. 2008년에도 5월13일 마칼루(8,463m)에 이어 같은 달 26일 로체(8,516m)를 올랐다.
오 대장이 14좌를 목표로 삼을 때 국내의 고미영씨도 함께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2009년 7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오른 고씨는 하산길 실족사고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 대장은 안나푸르나를 손잡고 함께 오르자던 고씨와의 약속대로 이번에 고인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올라 정상에 묻었다.
여성의 히말라야 8,000m 고봉 도전에서 우리나라는 일본에 비해서도 10년 가까이 출발이 늦었다. 일본의 경우 마카세코 나오코 등이 1974년 마나슬루봉을 밟으면서 히말라야 8,000m 고봉에 가장 처음 올랐다. 반면 한국에선 1984년 김영자씨가 처음으로 안나푸르나에 오르면서 8,000m 고봉 등반에 길을 열었다. 하지만 오 대장의 14좌 완등으로 우리 여성산악계는 이제 세계 여성 등반사를 새롭게 쓰는 주인공이 됐다.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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