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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소설가 한수산의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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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소설가 한수산의 30년

입력
2010.04.2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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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이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치욕과, 그로 인한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감과, 화해하는 데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소설가 한수산씨의 경우 30년의 세월이 걸렸다. 1981년에서 2010년까지. <부초> 와 <해빙기의 아침> 등이 이미 장안의 지가를 올렸던 1981년에 그는 서른다섯 살이었고, 30년이 지난 올해 예순네 살이 됐다. "이제 '인기 작가' '감성의 작가'라는 기존의 나에 대한 수식어 대신 넉넉한 인생의 지혜를 발휘하는 '노작가'로 불리고 싶다"고 최근 인터뷰에서 밝힌 그의 바람에서 30년 세월에 대한 뼈저림이 느껴진다.

"그 무렵 나는 읽고 있었다. 어떤 강론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하던 말이었다. 서로 사랑하라고. 서로 하나가 되라고. … 추기경님도 고문 한번 받아보시지요. 그러고 나서 어디 그 잘난 사랑법을 한번 알려주시지요."

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이 불경스럽게 들리는 대거리는 한씨가 최근 발표한 장편소설 <용서를 위하여> 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소설에서 그는 1981년 5월의 이른바 '한수산 필화 사건'의 전말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용서를 위하여> 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사실과 허구의 경계는 실상 없다. 한씨는 1년 전 김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듣는 장면에서 시작해 추기경의 어린 시절부터 사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며, 한국 종교사는 물론 군사정권에 의한 억압의 한국 현대사에서 정신적 거인으로 우뚝 섰던 고인의 모습에 담담하면서도 치밀하게 다가간다. 그렇게 되살려낸 김 추기경의 생애가 씨줄이라면, 한씨 자신이 당한 필화 사건은 이 작품의 날줄이다.

그는 필화 사건으로 당한 고문 이후 "벌레가 되어 살았다"고 이 작품에서 썼다. 그리고 덧붙였다. "벌레도 산다." 그러나 그건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고문으로 당한 육체적ㆍ정신적 고통보다 더 힘겨운 인간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인채 한동안 글 한 줄 쓰지 못했다. 자신을 고문했던 보안사의 사령관이 대통령이 돼 있는 동안, 1988년부터 4년 넘게 아예 이 땅을 떠나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1989년 백두산 천지에서 천주교 신자로 세례를 받으며 "어제까지의 지난 일은 다 잊거라. 용서한다. 너는 새 사람이다"는 하느님의 말을 '듣고' 눈물을 쏟았다. 김 추기경의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라는 말과, 한씨의 삶이 만난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을 것이다.

2000년 3월이니 벌써 10년 전이다. 한수산씨 등 몇몇 작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독일에서 개최된 한국문학낭독회를 취재했다. 함부르크 낭독회에서 그가 조용조용 <부초> 를 낭독하고 났을 때도, 동행들과 저녁자리에서 값싸고 괜찮은 포도주를 구해 담소할 때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았을 때도, 그에게 필화 사건 이야기를 물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캐물어야 한다는 기자적인 의무감보다 차마 그의 상처를 헤집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 더 강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웃음 뒤에도 웬지모를 그늘이 남아 있던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걸 물을 수는 없었다.

다시 10년이 흘러 그가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말을 화두로 스스로의 고통스런 기억을 가감없이 드러낸 것을 보고, 30년 세월과 어두웠던 80년대와 용서의 의미를 생각한다. 한씨는 이 작품의 후기에서 말하고 있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용서받지 못한다. 이 단순한 한 마디를 나의 것으로 이루어내는 데 저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한씨가 다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도 보았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아름답고 슬픈 소설 몇 편 더 쓰고 싶다." 이 말처럼 그가 '노작가'이기보다는 영원한 '감성의 작가'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하종오 문화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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