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부 공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데는 두 사람의 은인이 있다. 한 분은 노태우 대통령이고 다른 한 분은 김대중 대통령이다. 이 두 분은 모두 일면식도 없는 관계에서 나를 공직에 임명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에 관한 얘기는 앞에서 여기저기 언급했지만 그 분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좀 더 부연하고자 한다.
대학교수였던 나는 대체로 군사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나는 경제발전을 공부하면서 후진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독재체제가 필요악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했다. 1960년대 한국이 그 예가 될 수 있다고 여겼으며 그런 뜻에서 우리나라 산업화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공헌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70년대 유신체제 이후의 박정희 독재정치는 역사발전에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맥락에서 박대통령 이후 전두환 정권의 출범에 대해서 나는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동조하는 입장이었으며 중앙대 정경대학장으로 있을 때에도 학생운동을 최대한 보호하고 한사람의 희생자도 내지 않도록 했다는 것을 앞에서 언급한 바 있었다. 그러한 내가 노태우 정부에서 일하게 된 것은 이 정부가 국민들의 자유선택에 의해 태어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과 건설부 장관으로 노태우 대통령을 보필했지만 실세참모의 역할도 못했고 공직자로서 큰 업적을 내놓지도 못했다. 이것은 나의 능력과 여러 가지 환경의 한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약 2년 동안 곁에서 본 노태우 대통령은 인간적으로 매우 선량한 분이었다. 마음이 따뜻하고 남에게 모진 일을 하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함께 일할 때에는 인간적으로 서로 만나고 교류할 시간이 사실상 없었다. 청와대 수석시절에는 대통령을 자주 만날 기회는 있었지만 공적인 관계에서 공무에 국한된 것이었고 건설부 장관 때에는 그나마 만날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다. 나는 89년 7월 여러 가지 아쉬움을 남기고 정부 공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뒤로는 노 대통령이 퇴임할 때까지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93년 노태우 대통령이 퇴임하고 나서 대통령과 나는 비로소 인간적인 관계에서 가깝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자주 찾아 뵙고 문안을 드렸다. 이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노 대통령 내외분의 등산에 우리 내외는 거의 빠짐없이 동행했다. 정해창 비서실장 심대평 행정수석 이현우 경호실장 정구영 민정수석 등이 자주 동참했다. 등산은 북한산을 많이 다녔는데 구기터널에서 비봉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평창동에서 대성문을 거쳐 북한산 유원지로 내려가기도 했다. 강화 마니산처럼 멀리 가는 경우도 있었다.
노 대통령과 바둑을 두는 일도 종종 있었다. 지금은 내 바둑실력이 많이 줄고 잘 두지도 않지만 당시 나는 1급(아마 5단)을 두고 있었는데 대통령이 내게 4점을 놓고 두면 승률이 반반이었다. 지게 되면 대통령은 한 번 더 두자고 하는 일이 많았는데 승부욕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면 대통령과 점심을 같이 하는 일이 많았다. 노 대통령을 모시고 뉴코리아나 송추골프장에서 운동도 자주 했다. 테니스 운동 선수였고 거의 모든 운동을 잘 하셔서 골프도 나보다 더 잘 하셨다. 운동이 끝나고는 내가 자주 가는 반구정 매운탕 집에서 메기 매운탕을 대접한 일도 있다. 그런데 차츰 건강이 나빠지게 되면서 골프조차 못하게 되신 지 꽤 오래 되었다.
비자금 사건으로 구치소에 계실 때에는 두어 차례 면회를 갔었는데 우리 삶의 영욕이 이렇게 무상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건강이 나빠지게 된 뒤로는 한 해 한 해 갈수록 거동조차 불편하게 되셨다. 건강이 나빠질수록 더 찾아 뵙고 더 자주 만나야 할 것인데 실제는 그렇게 되질 않는다. 병문안이 오히려 불편을 드리는 결과가 되어 요즘은 찾아 뵙지도 못하고 전화로만 안부를 확인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노태우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친목모임에 육중회(六中會)가 있다. 제6공화국 중기내각 각료모임이라는 뜻의 이름인데 강영훈 총리를 회장으로 하고 김용래 총무처장관을 총무로 하여 1990년에 시작된 모임이다. 이 모임에는 이한동 정원식 총리, 조순 최호중 부총리, 고건 서울시장 등 약 40명이 참여하였다. 매년 몇 차례씩 노태우 대통령 내외를 모시고 만나 친목을 도모하면서 강사를 초청하여 강론을 듣기도 하고 기금을 만들어 우수 공직자와 환경미화원 들을 표창하기도 했다.
나는 이 모임에 자주 참여하고 한은 총재로 있을 때에는 몇 번 이 모임을 주선하기도 했다. 회원들의 요청으로 경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초야에 흩어져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다시 만나는 반가움이 있었다. 강영훈 총리는 내가 한은 총재로 있을 때 가끔 찾아 오셔서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누고 경제와 북한관련 자료를 챙겨가셨다. 김기춘 장관은 내가 한은 총재 재직 시 국회 법사위원장을 하셨는데 내가 한은 독립성을 강화하는 한은법 개정을 추진할 때 법사위에서 나를 적극 도와 준일이 있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노 대통령이 참석할 수 없게 되고 총무를 맡았던 김용래 장관도 타계하시고 건강이 안 좋은 분이 늘어나면서 요즘은 만나자는 연락조차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