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산 정상 이성계 국사당 내쫓고 384개 돌계단 쌓아 신궁 건립
서울 남산 정상에서 숭례문 쪽으로 내리뻗은 능선인 회현자락. 지금은 서울시민의 휴식처인 남산공원의 일부분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배의 상징이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자리잡은 채 조선의 수도를 내려다보고 있던 곳이다.
숭례문 위쪽 힐튼호텔 앞 아동광장에서 시작되는 남산공원은 요즘 성곽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진입로에서 김유신장군상이 있는 놀이터를 지나 백범광장까지의 능선 일대는 발굴 및 복원 공사로 군데군데 칸막이가 쳐진 가운데 흙이 드러나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둘러싼 성곽이 남산 봉화대 부근에서 이 능선을 따라 내려와 숭례문까지 이어져 있었다.
백범광장에서 일명 '삼순이 계단'으로 불리는 돌계단을 올라가면 중앙광장이 나온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분수대가 있는 이 일대가 조선신궁이 있던 곳이다. 조선신궁의 본전 자리는 정확히는 분수대 위쪽, 2006년 철거된 남산식물원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채 나무와 풀만 무성하다.
조선신궁은 1945년 해방 당시 전국에 1,141개나 됐던 일본 신사(神社) 가운데 격이 가장 높은, 신사의 우두머리였다. 일본 신사가 조선에 처음 세워진 것은 임진왜란 직후 두모포(豆毛浦ㆍ부산 동구 수정동)의 왜관(倭館)이었고,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몰려들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인천, 부산, 원산 등 개항지를 중심으로 늘어나 1910년 한일 강제병합 때는 42개에 이르렀다. 당시까지의 신사는 일본 거류민들의 단결을 위한 것으로 조선인과는 관련이 없었다.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神道)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후 천황이 권력에 복귀하면서 국가종교가 됐다. 일제는 점령지역이면 어느 곳이나 신궁이나 신사를 세우고, 일본인의 단결과 타민족을 동화ㆍ지배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청일전쟁 후 대만을 점령해 대만신궁(1901년)을 세운 일제는 1912년 조선신궁 설립을 위한 조사에 착수, 1919년 남산에 20만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920년 공사를 시작해 1925년에 완공했다.
조선신궁 건립 의도는 1924년 경성부(지금의 서울시)가 간행한 '경성부사(京城府史)'에 잘 나타나 있다. '병합 이래 조선총독부에서는 동화를 시정의 근본으로 하고… 지방에서 사설의 소사(小社)로서 만족할 수 없어서 마땅히 반도 전토에 걸친 국민 숭경(崇敬)의 중심이 될 일대 신사(一大 神社)를 창설하여… 국풍(國風) 이식의 본원으로 삼는 것은 조선 통치상 가장 긴요한 일이었다.'
일제는 조선신궁의 제신(祭神)으로 천황가의 조상신이자 일본 개국신화에서 시조로 등장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제국주의 침략을 시작한 메이지(明治)천황을 택했다. 조선인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조선의 시조인 단군을 모셔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으나 신궁 건립의 목적이 종교ㆍ정신적 식민지화에 있었으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숭례문에서 조선신궁 입구까지는 참도(參道)를 닦았다. 숭례문에서 힐튼호텔 앞에 이르는 지금의 소월길 초입이다. 신사 입구에서 본전이 있는 넓은 터까지의 능선에는 384개에 이르는 돌계단을 놓았다. "백범광장에서 중앙광장으로 올라가는 지금의 남산 돌계단의 축은 조선신궁의 돌계단과 일치한다"고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말했다. 남산 정상에 태조 이성계가 한양의 수호신사로 지었던 국사당(國師堂)은 인왕산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신사는 이미 조선인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일제가 조선신궁 진좌제(鎭座祭)를 갖던 1925년 10월 15일 일본의 신도평론사라는 잡지의 주간이 쓴 기록이 남아있다. "내지인(內地人ㆍ일본인)도 선인(鮮人ㆍ조선인)도 속속 돌계단을 오른다. 그러나 배전의 앞까지 가자, 내지인은 탈모하고 절을 하고 선인은 휙 발길을 돌려 돌아간다. 나는 한 시간 이상 배전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선인도 '참배'하는 자는 없었다. 선인은 '참배'하지 않고 '참관'하고 있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조선신궁 건립을 계기로 총독부는 민간 신사도 인가를 받도록 해 신사 참배와 제사의식을 통한 천황제 이데올로기 전파를 강화했다. 강제병합 직후부터 관공서와 학교에 천황 사진을 배포해 경례를 하고, 천황이 살고 있는 도쿄를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東方遙拜)를 하도록 했던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으로 대륙 침략을 가속화한 이후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해서는 모든 조선인에게 신사 참배, 동방요배, 일본에 대한 충성의 맹세인 황국신민서사 낭독 등을 강요했다. 일제의 강압에 '우상 숭배'라며 신사 참배에 크게 반발하던 기독교계마저 허물어졌다. 서울역 앞을 지나는 행琯涌“逃沮?남산의 신궁을 향해 절을 하도록 했다. 1940년부터는 신사 참배 거부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해 주기철 목사 등 50여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조선신궁의 역사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끝났다. 총독부는 그 해 8월 17일 신궁에 신물(神物)로 두었던 어영대(御影代ㆍ거울)를 비행기에 실어 일본으로 옮기고 건물을 해체했다.
해방 후 조선신궁 터에는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1960년 4ㆍ19혁명 이후 파괴됐다. 1958년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에 있던 국회의사당의 이전이 추진되기도 했으나 터를 닦는 도중에 무산됐다. 회현자락이 지금처럼 아동광장, 백범광장, 중앙광장으로 3등분된 것이 이 때였다.
1968년에는 조선신궁 본전 자리에 남산식물원이 들어섰고, 1970년에는 어린이회관(지금의 서울시교육과학연구원)과 안중근기념관이 그 아래쪽에 세워졌다. 1979년 9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 축전' 때 방문해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안 의사 기념관을 조선신궁 터로 옮기고 그 앞에 동상을 세워 현충사와 동격으로 성역화하도록 지시했으나 10ㆍ26으로 사장됐다"고 최명재 안중근의사기념관 사무국장은 전했다.
서울시는 남산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회현자락의 서울성곽 복원을 추진 중이다. 우선 7월말까지 아동광장 부근 능선 80여m의 성곽을 복원하고, 추후 발굴조사를 거쳐 중앙광장의 조선신궁 터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10월에는 신축공사 중인 새 안중근기념관이 완공된다. 남산이 수도 서울을 지키는 '남(南) 주작(朱雀)'의 옛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남경욱 기자 kwnam@hk.co.kr
■ "神社는 천황 이데올로기 강압의 구심점 역할"
신앙과 종교의 자유는 근대 시민사회가 오랫동안 피 흘리는 투쟁을 통해서 획득한 고귀한 기본적 인권이요, 근대국가가 보장해야 할 국민의 기본권이다.
그러나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수립된 일본의 천황제 국가는 그 성립 초기부터 전근대적인 제정일치(祭政一致)를 추구하였고, 천황을 ‘신성불가침’한 절대적 존재로, 나중에는 ‘살아있는 신(現人神)’으로 모든 국민들이 받들게 함으로써 국민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렇게 창출된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교육과 이른바 국가의례를 통해서 철저하게 국민들에게 주입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지배 이데올로기 정책은 당연히 국민의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였고, 사상과 학문의 자유까지도 제약하였다.
일제는 천황의 조상과 천황을 제신(祭神)과 최고 사제(司祭)로 한 국가신도(國家神道) 체제를 구축하여 종교를 초월한 위치에 두고, 그 밑에 교파신도(敎派神道ㆍ국가신도에서 분리된 신도계의 신흥종교)와 불교, 기독교를 공인종교로 하며, 기타 다른 종교들을 모두 불법화하여 통제ㆍ탄압하였다.
식민지에서 신사는 일제 지배의 상징이자, 천황제 이데올로기 확산을 위한 핵심적인 기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는 침략에 의하여 식민지를 획득하거나, 조차ㆍ위임통치에 의하여 시정권을 얻으면 예외없이 그 지역에 조선신궁과 같은 관폐대사(官幣大社)를 설립하고, 이를 중심으로 각급 신사(神社ㆍ군 단위 이상의 큰 신사)ㆍ신사(神祠ㆍ면 단위의 작은 신사)를 배치한 국가신도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를 거점으로 모든 교육기관과 행정력을 동원하여 동화정책 내지 황민화정책을 통해서 식민지인들에게까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였다.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과 촉탁으로 다년간 신사 행정에 관여한 오야마 후미오(小山文雄)는 1934년 발행한 저서 <신사와 조선> 에서 “(일본) 국체(國體)는 즉 신황신앙(神皇信仰) 위에 서 있다. 신사와>
그러므로 국민으로서 국가적 신도(神道)를 거부하는 것은 국체를 무시하는 것이요, 국민으로서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으로서 수입교(기독교)를 신앙한다는 이유로 국체신도를 받들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반(反)국민적이다”라고 했다. 일제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던 사람들을 탄압, 박해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따라서 일제의 신사 설립을 비롯한 신사 참배ㆍ동방요배 등 천황제 이데올로기 강요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인권인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민족정신 말살을 꾀한 정신적 침략 내지 정신적 테러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신사 흔적들/ 남산원 노기신사터 수조 남아있어…日 관광객들 발길
1,100개가 넘던 일본 신사는 해방 후 대부분 철거되거나 불태워져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구릉 위 전망 좋은 곳에 세워졌던 신사 터에는 공원이나 학교 등 공공건물이 들어선 경우가 많다.
서울 남산에는 조선신궁 외에도 경성신사, 노기신사가 있었다. 노기신사는 러일전쟁 때 뤼순(旅順)전투에서 일본군을 지휘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기렸던 신사다.
리라아트고등학교 옆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에는 신사 건물 3동이 남아 해방 후에도 30여년 동안 원생들의 숙소로 쓰였다. 그러나 1979년 화재로 소실됐고 지금은 신사 참배에 앞서 손을 씻기 위한 물을 담아뒀던 미타라이샤(手水舍)라는 수조만 남아있다.
박흥식 남산원 사무국장은 "일제 때는 이곳이 경성의 7대 명소에 포함돼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고 한다"면서 "1980년대 이후 일본인 학자나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해 요즘도 한 해에 60~70명이 다녀간다"고 말했다.
일제 당시의 원형이 남아있는 신사는 전남 고흥군 소록도의 구 소록도갱생원 신사가 거의 유일하다.
소록도에는 1935년 2개의 신사가 건립됐다. 해방 후 한센인 환자들이 살고 있던 곳의 신사는 환자들에 의해 불태워졌으나 직원들이 거주하던 곳의 신사는 지금까지 남았다. 외딴 섬에 있어 보존된 이 신사는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두모포의 왜관에서 옮겨진 조선의 첫 신사인 부산의 용두산신사 자리는 지금 용두산공원이 됐다. 대전 소제동 솔랑산 언덕에 있던 대전신궁 터는 소제공원이 됐다. 전주 다가산 구릉의 정상에 있었던 전주신사 터에는 충혼탑이 세워졌다. 춘천의 강원신사 터에는 호텔이 들어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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