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팬들에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유혹 덩어리다. 황정민과 차승원, 한지혜가 각각 이야기의 한 축을 맡아 호객한다. 가수 김창완과 정규수, 김보연 등의 조연 연기도 일품이다. '왕의 남자'로 대중의 별이 된 이준익 감독이 촬영 현장을 지휘하며 이들의 연기를 조율했다. 여러 매력이 부싯돌처럼 서로 부딪혀 불꽃을 발산해내는 이 영화에서 맹인 무사 황정학 역을 능청스레 연기한 황정민은 유난히 빛난다. 질끈 감은 눈에, 번득이는 해학과 칼 솜씨가 오랜만에 출현한 충무로산 사극에 웃음과 긴장을 안긴다.
영화의 근간은 박흥용 원작의 동명 만화로, 조선 선조시대를 배경으로 한 허구다. 일본의 위협을 눈앞에 두고도 민생을 외면하고 당쟁에 빠진 조정을 뒤엎으려는 남자 이몽학(차승원), 그의 공허한 야심을 막으려는 황정학의 갈등이 큰 줄기를 이룬다. 이몽학에게 아비를 잃고 황정학을 숫돌 삼아 복수의 칼을 가는 견자(백성현)와 이몽학의 여인 백지(한지혜)의 사연이 수려한 화면을 배경으로 가지를 뻗는다. 이런 미덕에도 불구하고 허무로 가득찬 결말이 관객들에게 이물감을 주는 게 못내 아쉬운 영화다.
황정민에게는 첫 사극이나 다름 없다. 국군과 인민군이 시간여행을 통해 이순신을 돕는다는 내용의 '천군'이 있었지만 "만화 같은 영화"였을 뿐이다. 그는 "갓 쓰고 하는 연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의외로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대극은 감정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사극은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사극의 해학은 전 세계에서 우리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마당놀이하는 느낌이었고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난이도가 상당했을 맹인 연기는 "마음 편하게 먹고 그냥 눈감고 해냈다"고 했다. "어차피 내가 맹인이 아닌데 맹인처럼 할 수 없으니 흉내만 내자"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대본을 넘실넘실 타고 넘어가며 황정학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느냐와 이몽학, 견자와의 관계 설정이 더 중요했다. 관객들은 황정학의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지 맹인의 눈떨림 연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하게 눈감고 연기했다지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칼들이 서로 부딪히는 장면들이 무시로 나온다. 와이어와 컴퓨터그래픽을 배제한, 진검승부와도 같은 칼싸움이 아찔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두 눈 부릅뜨고 해도 시원찮을 이 검술 액션을 황정민은 오감 중 주요 감각인 시각을 포기하고 해냈다. 크랭크인 전 3개월 동안 매일 5시간씩 합을 맞췄기에 가능했던 연기다.
"와이어 등에 의지하지 않은 액션이라 자부심을 느낀다. 원래 대역들이 있었는데 다른 역할을 하다 다쳐 차승원씨랑 내가 직접 해냈다. 3개월 동안 똑 같은 동작을 반복했으니 눈 감고도 호흡이 척척 맞았다. 물론 눈을 감고 소리에만 의지하려니 처음엔 불안했다. 사람 몸이 재미있는 게, 조금씩 온 몸의 감각들이 살아나고 안 보이는 것에 적응을 하더라."
대사의 3분의 2는 애드리브. 침을 맞기 위해 허연 등을 내놓고 엄살 떠는 기생들을 향해 그가 날리는 "소도 때려 잡아 먹을 X들" 등의 걸쭉한 대사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만들었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한 감독의 영화에 두 번 이상 출연하지 않고, 비슷한 배역을 반복하지 않은 이 배우는 연기 욕심이 많은 듯하다. 지금은 비리 형사로 변해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를 촬영 중인데, 차기작 '모비딕' 출연까지 정해져 있다. "정부 위의 정부를 캐는 기자 역을 맡는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다. 난 한 달만 쉬어도 몸이 근질거린다. 출연 제의가 끊이지 않고 팬들도 내가 맡은 역할에 만족한다. 찍다가 엎어진(무산된) 영화도 하나 없다. 난 운이 참 좋은 배우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